포세이돈, 70년대 해양 재난영화 최고봉 '포세이돈 어드벤처' 리메이크

19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세대들에게 명배우 진 해크먼의 출연작 중 가장 인상 깊은 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두말없이 1972년 해양재난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를 천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냉전시대 미국의 불안과 공포를 은유하는 재난영화가 우후죽순 만들어지던 70년대, 그 많은 재앙의 순간을 다룬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엔딩으로 기억되는 작품이 또한 <포세이돈 어드벤처>이다.

뒤집힌 대형유람선에서 탈출하려는 마지막 순간 생존자들을 위해 희생하는 신부를 연기하는 진 해크먼의 인간적인 모습은 그것을 물량공세로 관객의 환심을 끌려는 그렇고 그런 재난 블록버스터들과 격이 다른 작품으로 승격시켰다.

강렬한 잔상을 뇌리에 남긴 휴먼드라마인 이 영화가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해양 블록버스터의 제왕 볼프강 피터슨 감독(<특전 U보트> <퍼펙트 스톰> <트로이>)에 의해 다시 만들어졌다.

행복의 터전을 덮친 수마

<포세이돈>은 독일에서 활동하던 시절 연출한 <특전 U보트>와 조지 클루니가 어부로 나온 <퍼펙트 스톰>에 이은 이른바 ‘볼프강 피터슨의 해양 재난영화 3부작’ 완결편이라 할 수 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에서 모티프를 취하기 했지만 배가 뒤집힌다는 설정 외에 원작과 닮은 구석이 썩 많지는 않다.

<에어 포스 원> <트로이> <사선에서> 등 선 굵은 남성적 블록버스터 영웅담에서 재능을 발휘했던 피터슨은 <포세이돈>을 가족주의를 예찬하는 지극히 미국적인 시민 영웅담으로 탈바꿈시켰다.

새해를 목전에 둔 12월 31일, 호화유람선 포세이돈 호는 파티로 흥청거린다. 바로 그때 갑작스레 거대한 쓰나미가 배를 덮치고 단란함과 행복함이 넘쳤던 포세이돈 호는 처절한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한다.

프로 도박사 딜런(조시 루카스)은 뒤집힌 배의 밑바닥 쪽으로 탈출구를 찾아 나서고 딸을 잃어버린 전직 시장 램지(커트 러셀)와 어린 아들을 둔 엄마 매기(제이신다 베렛), 그리고 실연당해 자살을 기도하려 한 게이 건축가 넬슨(리처드 드레이퓌스)이 여기에 합류한다.

그들은 무너진 나이트클럽에서 램지의 딸 제니퍼(에미 로섬)와 남자친구 크리스찬, 그리고 밀항자 엘레나를 만난다. 천신만고 끝에 램지 일행은 조금씩 탈출구를 향해 나아가지만 무수한 희생과 역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에서 거대한 유람선이 180도로 뒤집히는 스펙터클한 장면은 당시 관객들에게 미증유의 시각적인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 이후 유람선이 좌초되는 스펙터클은 더 이상 진화되지 않았다.

<포세이돈>은 카메론이 미니멀한 스펙터클 대신 고전적인 아날로그 화면과 편집에 좀 더 무게를 둔다. 배를 덮치는 거대한 쓰나미는 CG로 만들어졌지만, 20층 높이에 객실만 4천여 개인 호화유람선 포세이돈 호가 뒤집히는 장면을 찍을 때 실물 크기의 세트에 실제로 34만 리터의 물이 쏟아졌다.

디지털 신기술이 영화 비주얼의 모든 걸 잠식한 시대에, <포세이돈>의 스펙터클은 드라마틱한 생생함으로 고전적 쾌감을 안겨준다.

할리우드 가족드라마의 한계

전형적인 할리우드 가족드라마의 보수성은 <포세이돈> 같은 재난 블록버스터의 특징이다.

하위 계급의 유색인종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고 백인 가장의 거룩한 희생을 담보로 미래에 가족을 이루게 될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 남는다는 고루한 설정을, 이 영화는 반복한다. <포세이돈 어드벤처>와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곤경에 빠진 무리를 구하는 메시아의 역할이 ‘신부’에서 ‘시장’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재앙을 돌파하는 불굴의 영웅은 뉴욕 시장이다. 커트 러셀이 연기하는 램지에겐 9.11테러의 가장 큰 희생양이었던 뉴욕과 하룻밤 사이 폐허로 변한 그 도시의 시민들을 독려한 뉴욕 시장 줄리아나의 이미지가 포개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흔든 재앙을 경험한 미국인들에게 뉴욕 시장을 리더로 내세운 재앙 극복기는 남다른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아이와 여자를 보호하는 미국적 기사도 정신이 이 영화가 찬양하는 가치다. 이 같은 시민 영웅의 활약은 <퍼펙트 스톰>의 어부들과 비슷하지만 거기에 가족애라는 동기로 거룩한 자기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강건한 가부장 이미지가 더해진다.

<퍼펙트 스톰>이 별다른 기승전결 없이 바다와 사투를 벌이는 어부들의 이야기를 정공법으로 다뤘다면, <포세이돈>의 드라마는 비교적 굴곡이 뚜렷하다. 캐릭터의 영기(靈氣)라는 측면에선 <포세이돈 어드벤처>에서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웠던 어네스트 보그나인과 진 해크만, 셜리 윈터스에 미치지 못한다.

커트 러셀과 리처드 드레이퓌스는 재난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경험이 있지만 원작에 대한 향수를 자극할 정도의 범상한 연기밖에 보여주지 못한다. <오페라의 유령>으로 부상한 에미 로섬을 비롯한 젊은 배우들 역시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포세이돈>은 고전적이고 긴박감 넘치는 재난 스펙터클 장면과 해양영화에 대한 기이한 열정을 품은 볼프강 피터슨의 관심사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주인공을 뉴욕 시장으로 바꾸긴 했지만 바깥으로부터 엄습해 온 재앙의 공포에 대한 의미심장한 메타포가 이 영화에는 없다.

그러나 <에어 포스 원>, <사선에서>, 에서 보여줬던 피터슨의 서스펜스 연출 솜씨는 <포세이돈>에서도 녹슬지 않았다. 별점을 매기자면 ‘평균’ 이상이다.

드라마의 전형성이나 이데올로기의 보수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큰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는 게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의 내공이 아니던가.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