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말코비치 되기

마당극과 창극의 개척자 허규 선생이 별세한 지 5년이 지난 지금 그가 생전에 운영해 왔던 북촌창우극장이 최근 새로운 주인을 만났다.

평소에 인형극을 각별히 여겨오던 고인의 뜻에 따라 인형극 전문 극장이 문을 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개관기념 작품이 이름부터 다소 생소한 '마리오네트 인형극'이었다.

마리오네뜨 인형극은 쉽게 말해서 '줄인형극'이다.

인형의 팔 다리에 줄을 달아 무대 위에서 조작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꼭두각시 인형극과 같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 선생님과 아이들이 트렙 대령과 그의 애인 앞에서 선보인 공연이 바로 마리오네트 인형극이기도 했다.

인형극에서 인형을 조정하는 연출자를 '대잡이'라고 하는데 사운드 오브 뮤직보다 더 전문적인 대잡이를 만나보고 싶다면 영화 '존 말코비치 되다'를 추천한다. 존 쿠삭이 무명 인형극 제작자 겸 연출가로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예술의 경지에 오른 마리오네트 인형극의 섬세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인형극은 하나의 소품에 불과하지만 크레이크 슈와츠(존 쿠삭)가 극중에서 연기하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인형극은 단순한 소품 그 이상이다.

성직자 아벨라르와 18세 소녀 엘로이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슈와츠와 그가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맥신의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예견하는 듯하다. 여기에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성속(聖俗)을 넘나드는 사랑은 그의 부인 로테와 맥신의 세속의 성(性)을 넘어선 동성애와도 연결된다. 둘 다 세속의 기준으로는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한 남자와 두 여자. 이들의 얽히고설킨 사랑 이야기의 중심에는 엉뚱하게도 존 말코비치가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뚜렷한 수입원이 없는 인형극 연출가 크레이그 슈와츠. 그는 애견병원을 하는 부인 로테의 잔소리에 못 이겨 서류 정리 회사에 취직을 한다.

그런데 이 회사, 위치부터 수상하다. 00빌딩 7.5층. 엘리베이터에도 있지 않은 7.5층에 겨우 겨우 내렸더니 천장이 너무 낮아 허리를 숙이고 다녀야 한다. 변태같은 사장은 7.5층의 유래를 설명해주지만 왠지 거짓부렁 같기만 하다.

하지만 그에게 회사다닐 이유가 생겼다. 슈와츠는 매끈한 여직원 맥신에게 한눈에 반하게 되면서 그녀에게 열렬히 구애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에 한 켠에서 이상한 구멍을 발견하고 그 구멍이 배우 존 말코비치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임을 알게 된다. 슈와츠는 맥신과 함께 존 말코비치가 되는 통로를 이용해 사업을 시작하고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존 말코비치가 되기 위해 몰려든다.

그 사이 그의 부인 로테도 존 말코비치가 되는 경험을 하고 존 말코비치의 몸을 통해 맥신과 사랑에 빠진다. 존 말코비치를 매개체로 사랑에 빠진 맥신과 로테. 이들은 결국 현실에서도 동성애에 빠져들고 만다.

그 둘을 갈라놓기 위해 존 말코비치의 몸으로 들어가 그를 조정할 수 있는 경지에 까지 오른 슈화츠. 그는 이제 가짜 마리오네트 인형이 아닌 진짜 말코비치를 조정하며 살아있는 인형극을 시도한다. 하지만 존 말코비치의 몸에 들어가려는 변태 사장까지 등장하면서 일은 점점 꼬여만 간다.

영화 속에서 모두가 존 말코비치가 되는 기발한 설정은 모두 극작가 카우프먼의 상상력이다. 왜 하필 존 말코비치인가 하는 것도 오로지 카우프먼만의 상상력이다.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나온 이야기치고는 상당히 산발적이고 산만하다.

하지만 영화가 전해주는 한 가지 메시지는 명쾌하다. 우리 주위에도 꼭두각시처럼 조정되는 주체성 없는 존 말코비치들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권력의 혹은 권력자의 꼭두각시가 되기 위해 기이한 7.5층 사무실 같은 음지에서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현실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화 속에서 말코비치가 되도록 허락된 시간은 단 15분이었다는 사실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