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作,

“내가 열세 살이었을 때 어머니는 이를 모두 뽑아야 했다. 어머니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나는 문가에 서 있었다. 어머니는 반듯하게 누워 턱을 앞으로 쑥 내밀고 있었는데, 이가 모두 뽑혀 나간 뺨이 훌쭉했다.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었고, 그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비명을 지르거나, 어머니 옆에 가서 눕거나, 그래서 그 옆에 가서 누웠다.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라 기쁘다고 해서 그걸 바로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우리는 둘 다 기다려야 했다. 몇 분이 지났을 때 이불 속에서 한쪽 팔을 꺼내 당신의 찬 손으로 내 손목을 쥐었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을 견딜 수 없단다. 어머니가 말했다. 정말 안 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어. 대부분이 그걸 견디지 못해. 존, 엄마 생각에 너는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두고 보자꾸나. 세월이 흐르면 알게 되겠지.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냥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그랬던 어머니, 그 어머니는 죽고, 어린 아들은 자라 어른이 되었고, 예술가가 되었다.

이제 어머니가 죽은 나이보다 더 나이를 먹은 늙은 아들은 어느 날 포르투갈 리스본을 여행하던 중 15년 전에 죽은 어머니를 만난다.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들은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죽은 다음에 많은 것을 배웠단다. 그러니까 너도 여기 있는 동안 나를 잘 이용해. 죽은 사람은 사전 같아서 모르는 것을 찾아볼 수 있어.”

죽은 어머니와 늙은 아들은 팔짱을 끼고 시내의 광장을 걷고, 주택가의 계단을 오르고, 사람들로 붐비는 전차를 타고, 수산시장의 생선들을 구경하고, 카페의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눈다.

이것은 당연히 조금도 으스스한 장면이 아니다.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지막 만남에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일러준다.

“저 개는 줄이 너무 밭아. 그걸 바꿔 봐, 길게 늘여 보라고. 그러면 개는 그늘에 들어갈 수 있을 테고, 그러면 드러누워서 짖기를 멈추겠지. 그렇게 조용해지면 저 집의 어머니는 부엌에 카나리아 새장을 걸어 놓고 싶었다는 게 기억날 거야. 카나리아가 노래를 불러 주면 그녀는 다림질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테고. 새로 다린 셔츠를 입고 출근을 하는 아버지의 어깨는 조금 덜 쑤시겠지. 그러니까 퇴근해서 집에 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십대인 딸과 가끔씩 농담을 할 거야. 그리고 딸은 큰맘 먹고 이번 한 번만 남자친구를 저녁식사 때 집에 데려가자고 결심할 거야. 그리고 아버지는 그 젊은 친구에게 언제 같이 낚시를 하러 가자고 할 테고...... 누가 알겠니? 그냥 줄을 길게 늘여 보는 거야.”

영국 출신의 미술평론가, 사진이론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 그리고 소설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존 버거(1926- )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80세를 맞이한 한 예술가의 자전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소설이다.

소설은 유럽의 여러 도시를 배경으로 한 늙은 예술가가 인생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만나고 사랑하고 (대부분 죽음으로) 헤어진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기억하고 또다시 떠나보내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죽음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삶의 일부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온전히 살아있는 사람이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단순히 재미난 읽을거리로 ‘긴박한 모험’이나 ‘두근거리는 로맨스’를 기대할 수는 없다. 소설은, 소설의 문장은 그저 강물처럼 흘러간다. 그러나 그 강물이 긴박한 모험이나 두근거리는 로맨스를 알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니. 강물 속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 무심하고 거대한 물결을 오래도록 말없이 바라보는 사람은 인생의 모든 것을 담고 흘러가는 강물 속의 깊은 눈동자를 알아보게 된다.

어떤 조건과도 무관하게,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진정 아름다운 소설이란 결국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감상에 젖게 한다. 소설이란 결코 가볍지 않은 인생의 진실을 온전히 감당해온 늙은 인간의 나직한 목소리와도 같은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지. 그가 말했다. 울어야겠으면, 정말 울어야겠으면 나중에 울어. 도중에 울지 말고! 이걸 기억해야 해.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 오직 그 사람들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면 말이야. 물론 그렇다면 너는 이미 운이 좋은 거지. 세상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그들과 함께 있을 땐 도중에 울어도 좋아.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 울어.”

‘나’는 제네바의 한 공동묘지로 간다. 재능 있고 아름다운 여성이 된 딸을 자신의 모터사이클 뒷자리에 태우고. 나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묘비 앞에 선다. 나는 보르헤스의 싯귀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상처를 합리화해야 한다. / 나의 행운이나 불운은 상관없다. / 나는 시인이다.”

나는 또한 어린 시절 한 서커스단의 코미디언이 웃기고도 슬픈 목소리로 무대 위에서 외치던 소리를 기억한다.

“인생은 정말 어려운 거죠. 이걸 살아서 넘기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나는 어머니를, 아버지를, 스승을, 친구를, 연인을 만나고 사랑하고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반복된다. 그것이 진실이고 그 진실은 예술을 통해 드러난다. 그것이 어두운 쇼베 동굴 속 크로마뇽인이 그려놓은 오래된 동굴 벽화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예술은 낳자마자 걸을 수 있는 망아지처럼 태어나는 것 같다. 예술을 탄생시키는 재능에는 그 예술에 대한 필요가 수반된다. 그 두 가지는 함께 나타난다.”

나는 글을 쓰는 인간이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네가 찾아낸 것만을 쓰렴. 어머니가 말했다. // 제가 뭘 찾아낸 건지 전 끝끝내 모를 거예요. 내가 말했다. // 그래, 끝내 모를 거야. // 글을 쓰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내가 말했다. // 용기는 생겨날 거다. 네가 찾아낸 것을 쓰고, 그걸 우리에게 알려주는 호의를 베풀렴.”

기꺼이, 문득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지난날의 어느 아침, 무심히 펼쳐든 존 버거의 글을 누군가에게 읽어주던 순간이 있었다. 다른 어느 아침, 누군가가 내 머리맡에서 나직이 존 버거의 글을 읽어주던 순간이 있었다.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보다 오래 전 어느 가을밤, 또 다른 누군가의 손에 존 버거의 책을 들려주고 황망히 집으로 돌아오던 순간도 있었다. 거기, 아니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서였다. 진실과 용기, 그리고 가냘픈 희망......


이신조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