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유화부인

▲ 유화부인이 살던 북부여가 송화강변
유화부인(柳花夫人)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성왕(鄒牟聖王:동명성왕)의 어머니이니 곧 고구려의 국모였다. 사후에 부여신(夫餘神)이란 이름으로 신성·신격화되어 고구려 군신(君臣)과 백성들의 지극한 섬김을 받은 하백(河伯)의 딸 유화부인은 어떤 여성이었는가.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송화강 어느 기슭에서 ‘강의 신’을 자처한 하백이란 부족장에게 유화(버들꽃)·훤화(원추리꽃)·위화(갈대꽃)라는 딸 셋이 있었다.

어느 해 여름날 세 자매는 더위에 못 이겨 강으로 물놀이를 나갔다가 위풍당당한 영웅적 풍모의 한 젊은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천제의 아들인 천왕랑(天王郞) 해모수(解慕漱)라면서 강물로 풍덩 뛰어들어 아가씨들을 희롱하며 놀았다.

그리고는 세 자매를 자신이 임시로 거처하는 집으로 초대했다. 그 집에서 젊은이가 대접하는 갖가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노라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해모수가 문 앞을 가로막으면서 못 가게 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훤화와 위화는 가까스로 달아났지만 유화는 꼼짝없이 붙잡혀 그날 밤 해모수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말았다.

해모수 이름 팔며 유화 농락

그런데 정말 비극은 그 다음에 시작되었다. 자칭 해모수라는 바람둥이가 점점 배가 불러오는 유화를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린 채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딸을 버린 하백은 기가 막혔고 몸을 버린 유화는 눈앞이 캄캄했다.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따르면 해모수를 자처한 이 바람둥이의 정체는 해모수의 증손자인 불리지라고 한다. 그러니까 불리지가 증조부인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이름을 팔아 유화를 농락했던 것이다.

화를 참지 못한 하백은 유화의 입술을 석 자나 잡아 늘리고 태백산(백두산) 남쪽 우발수로 내쫓아버렸다.

처녀가 아이를 배자 사내는 달아나버리고 아비는 집에서 쫓아내니 유화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짧지만 한 많은 인생을 스스로 끝내려고 우발수 깊은 물에 풍덩 몸을 던졌는데, 죽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나가던 어부가 유화를 물에서 건져 올려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에게 바쳤던 것이다.

금와왕이 어찌된 일이냐고 묻기에 유화가 할 수 없이 해모수라는 바람둥이와 사통하여 임신을 하고 부모에게 쫓겨난 사정을 이야기했다. 금와왕이 이야기를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비록 버림받은 여자라고는 하나 자태가 빼어나게 아름답기에 자신의 후궁으로 삼을 욕심이 생겨 궁궐로 데리고 가서 방 하나를 주고 머물게 했다.

그리하여 유화가 달이 차서 서기전 58년 음력 5월 5일에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골격이 튼튼하고 외모가 영특하게 생겼으며 나면서부터 이내 말을 할 줄 알았다.

금와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여러 부족장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혈육이라는 저 기이한 아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므로 어쩌지 못하고 유화에게 돌려주면서 길러도 좋다고 허락했다.

유화의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났는데 어려서부터 활을 매우 좋아했고 잘 쏘았다. 파리가 귀찮게 굴어서 잠을 잘 수 없다면서 어머니에게 활을 만들어달라고 하여 유화가 조그만 장난감 활을 만들어주자 그것으로 파리를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그리고 나이 일곱 살이 되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보이는 대로 쏘는데 역시 백발백중의 신기(神技)였다. 마침내 신궁(神弓)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는 추모(鄒牟), 또는 주몽(朱蒙)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부여말로 ‘활 잘 쏘는 이’, ‘우두머리’란 뜻이었다.

추모가 이처럼 어려서부터 비상하게 빼어난 재주를 보이자 그는 이내 주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때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무엇을 하고 놀아도 추모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했다.

맏아들 대소(帶素) 등이 추모를 죽이려고 여러 차례 기회를 엿보자 하루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얘야, 장차 왕자들이 너를 해코자할 터이니 미리부터 방도를 마련해둠이 좋지 않겠느냐?”하고 일렀다.

추모가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 하고 다른 여러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고 오로지 준마 한 필만은 바늘로 혀 밑을 찔러서 비쩍 마르게 했다. 금와왕이 둘러보고 추모에게 말을 잘 돌보았다며 칭찬한 뒤 상으로 가장 여윈 그 말을 주었다.

활로 파리 맞추던 '신동' 주몽

그해 10월 제천대회(祭天大會)에서 추모가 그 말을 타고 사냥대회에 참가했는데 금와왕은 추모가 혹시 많은 짐승을 잡아 자기 아들들의 기를 죽일까 걱정되어 화살을 한 대밖에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말은 타고난 준마요 탄 사람은 하늘이 내린 신궁인지라 말달리고 짐승을 몰아 쏘면 쏘는 대로 명중시키니 추모 혼자서 화살 한 대로 잡은 짐승이 일곱 왕자가 잡은 짐승을 다 합한 것보다도 많았다.

대소가 참을 수 없는 질투와 분노로 온몸을 떨다가 또다시 아우들과 합세하여 추모를 기어코 죽여 없애려고 달려들었다. 어머니 유화부인이 이를 알고 추모로 하여금 한시바삐 먼 곳으로 도망치도록 재촉했다.

그해에 추모는 21세. 그 전해에 예씨(禮氏)에게 장가들어 어른이 되었으며, 그때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하지만 목숨부터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했기에 추모는 오이·마리·협보 세 명의 심복을 거느리고 졸본부여로 망명하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졸본부여에서 힘을 길러 그 이듬해에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니 곧 고구려였다.

유화부인이 손자를 본 것은 아들이 망명한 지 반년쯤 지난 서기전 37년 초였다. 손자가 태어날 당시 유화부인의 나이는 40세 전후로 추정된다. 그리고 추모대왕 재위 14년(서기전 24) 8월에 동부여에서 파란만장했던 한 삶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고 했으니 그때 나이 55세 전후였을 것이다.

손자 유리(類利)가 태어났을 때 유화부인은 시어머니요 할머니로서 즐거운 마음으로 해산을 도왔을 것이고,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나 개구쟁이가 되고, 다시 장가들 나이인 15세의 의젓한 총각으로 자라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추모대왕의 어머니요 고구려의 국모인 유화부인은 꿈에도 그리던 아들의 모습을 한 번 더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았을 것이다. 어찌 어머니로서 자식이 보고 싶지 않았을까.

더구나 인편을 통해 아들이 새 나라를 세우고 대왕이 되어 천하 사방을 호령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찌 그 장한 아들의 모습을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으랴. 하지만 유화부인은 그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고구려인 '수확의 여신'으로 추앙

▲ 하얼빈시 전경

유화부인의 이승살이는 그렇게 막을 내렸는데, 비록 인간 유화부인의 일생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그녀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여신으로 고구려 백성들의 가슴 속에서 거듭 태어나게 된다.

고구려는 추모대왕이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하백의 외손이라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천손국(天孫國)이란 자부심이 매우 컸다. 그래서 그들은 추모대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에게 성왕, 곧 ‘성스러운 대왕’이란 묘호를 바치고 신상을 만들어 신묘에 모시며 고등신(高等神)이란 시조신으로 받들었다.

또한 시조신의 어머니요 국모인 유화부인도 여신상을 만들어 신묘에 모시고 부여신이라고 부르며 자자손손 받들어 모셨다.

요즘으로 치면 미혼모에 불과했던 유화부인은 이렇게 해서 대제국 고구려의 여신으로 신성·신격화될 수 있었다.

그녀가 여신으로 영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시조 추모성왕의 어머니라는 사실에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물의 신인 하백의 딸이라는 신분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아들이 망명 직전에 오곡의 종자를 챙겨주었다는 설화로 미루어보건대 이미 백성들의 의식 속에는 유화부인이 곧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수확의 여신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