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호 감독 '강적' - 서로의 목적을 위해 의기투합하는 형사와 탈옥수

바야흐로 ‘사내영화’ 전성시대다.

<야수>, <짝패>, <사생결단>, <비열한 거리> 등 제목에서부터 진한 수컷 냄새가 풍기는 남자영화가 충무로의 새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남성 버디(짝패) 무비, 혹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잔혹한 운명의 주인공들을 그리는 남성 누아르는 지난해 말부터 이어져 온 분명한 기류다.

다른 한편에서 ‘예쁜 남자 신드롬’이 유행하고 있는 걸 보면 기이하지만 둘 모두 ‘남성에 관한 판타지’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점도 있다.

<강적>은 캐릭터의 면모로 보자면 판타스틱한 남자영화 계보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 남자영화와 달리 분방하고 스타일리시한 이미지, 예측을 불허하는 드라마로 주목할 만한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형사 나으리 내가 수술비 마련해드리리다"

한때는 민완형사였으나 4년 전 아내가 집을 나간 후 망가질 대로 망가진 강력계 형사 성우(박중훈).

잠복 근무 중 근무지를 이탈했다 파트너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목숨을 잃는 사고를 당한다. 책임을 묻는 주변의 목소리로 인해 괴로워하던 성우는, 설상가상 장기기증을 기다리는 아들에게 기증자가 나타나지만 수술비 4,000만원을 마련할 방도가 없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틀.

한편 과거 조직에 몸 담았다가 개과천선한 수현(천정명)은 고아원 시절 친구이자 조직 일원인 재필의 부탁으로 다른 조직원을 칼로 찌른 뒤 경찰에 붙잡힌다. 조직의 음모로 살인 누명까지 쓰게 된 수현은 탈옥을 감행하고 그 와중에서 성우가 그의 인질이 된다.

4,000만원을 구하기 위해 순직 수당이라도 타려는 성우는 수현에게 자신을 죽일 것을 종용하지만, 수현은 그에게 수술비를 구해줄 것을 약속한다. 이제 인질과 범인이지만 똑같이 궁지에 몰린 두 남자는 서로 다른 목적으로 의기투합한다.

<강적>은 <정글쥬스>에서 청량리를 배회하는 ‘양아치’들의 삶을 뒤틀린 유머감각으로 그려냈던 조민호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조민호의 관심사는 여전히 한국 사회의 중심부로부터 비껴 난 패배자들의 삶이다. <강적>의 두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정글쥬스>의 그것보다 더욱 가혹하다. 양아치들은 나이를 먹었고 세상은 그들에게 감내할 수 없는 책임을 요구한다.

<강적>은 더 이상 양아치로만 살아갈 수 없는 두 남자의 전력질주를 보여준다. 유사한 소재를 지닌 <비열한 거리>가 스타일을 죽이고 선 굵은 드라마로 승부했다면, <강적>은 공들인 시나리오, 줌과 화면분할을 오가는 현란한 화면으로 ‘스타일’에 무게를 싣는다.

세심하게 계산된 카메라 앵글과 리드미컬한 편집은 거친 사내들의 강퍅한 삶에 윤기를 더하는 이 영화의 강점이다. 때론 그것이 종종 샛길로 빠져버리는 시나리오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지만 소소한 이야기들을 한데 묶어 전진시키는 추진력이 된다.

밑바닥 인생을 쿨하게

<강적>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밑바닥 인생의 극악스러움을 ‘쿨하게’ 보여주는 조민호 감독의 독특한 화법에 있다. 보잘것 없고 실패한 듯 보이는 막장 인생의 한 켠을 비집고 나오는 생의 의지. 조민호는 그 꿈틀거리는 에너지를 긍정한다.

이 같은 세계관은 허를 찌르듯 이 영화의 유머와도 관련이 있다. 누아르 풍 영화는 유머를 매우 신중하게 사용하거나 배제해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에서 유머는 가장 진지한 순간에 신경질적으로 터지는 웃음처럼 히스테릭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예컨대, 심한 부상을 당한 수현을 끌고 죽기살기로 헤매던 성우가 도움을 받는 곳은 종로 뒷골목의 ‘동물병원’이다. “여긴 동물만 받아요?”라며 무뚝뚝하게 돌아서는 여수의사를 향해 성우는 “사람은 동물 아뇨?”라며 맞받아치고, 결국 수술을 시작한 수의사는 한마디 던진다. “동물보다 편하네, 털 안 깎아도 되고···.”

누명을 쓰고 투옥된 수현을 면회온 애인 미래가 “오빠 배고프지?” 하더니 그들 사이에 놓여진 유리 칸막이 작은 구멍들 사이로 삶은 계란을 발라주자, 수현이 그걸 먹으려 애쓰는 식이다.

감정적으로 한껏 고양된 순간에 등장하는 엉뚱한 유머는 몰입을 방해하지만, 그 속에는 감정의 과잉을 털어내려는 의도적인 거리두기가 있다.

스타일이나 유머의 농도는 전혀 다르지만 이 같은 ‘의도된 쿨함’은 <그 남자 흉포하다>, <소나티네>, <하나비> 등 기타노 다케시의 야쿠자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강적>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길거리 추적 장면은 다케시의 <그 남자 흉포하다>의 범인 추격전을 연상시킨다.

발품의 흔적이 묻어있는 로케이션은 이 영화의 또 다른 힘이다.

술집과 기와집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고즈넉한 골목들은 옛 것과 새 것이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서도 한데 공존하고 있는 종로의 모습을 비춘다. 공들여 찍은 한강의 밤 풍경과 삶의 피로가 뚝뚝 묻어나는 인천의 부둣가는 드라마 전면에 부각되지 않지만 분위기를 끌고 가는 중요한 요소다.

무대로 삼고 있는 종로 뒷골목처럼 <강적>은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는 영화다.

드라마의 큰 틀은 누아르의 전형적 구조를 따라가지만, 소소한 에피소드들은 장르의 틀을 해체하려는 위반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 아리송한 반역의 의지 때문에 드라마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비난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민호 감독은 장르에 대한 충실도라는 점에 있어서도 특유의 ‘쿨한’ 태도를 취한다. ‘고정된 게 어디 있어? 재미있으면 즐겨’라는 식이다. 그 위반의 신호를 감지한다면 <강적>은 충분히 즐길 만한 영화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