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 감독 '한반도'

한 편의 영화를 글에 비유한다면 흔히 소설을 떠올릴 것이나 시나 에세이, 수필에 해당하는 영화도 있다. 심지어 논설문이나 설명문(다큐멘터리가 여기에 속한다) 식 영화도 있다.

<한반도>는 그 모든 것을 무효로 돌리는 ‘웅변영화’라 할 만하다. <실미도>로 관객 1,000만 시대를 열었던 불세출의 흥행사 강우석은 철권통치 시절 베일에 가려있던 실화사건을 다룬 전작과 달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을사늑약을 소재로 삼았다.

우선 ‘한반도’라는 제목은 ‘실미도’라는 제목과 전혀 다른 뉘앙스로 다가온다. ‘실미도’가 불러 일으키는 모종의 궁금증과는 반대로 ‘한반도’는 뚜렷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북한과 남한을 통칭해서 부르는 그 말은 철권통치 시절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가장 많이 외쳤던 통일을 염원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더구나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일본이 노골적으로 군사대국화 속셈을 드러내면서 한일 간의 외교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 ‘한반도’의 의미는 현재형으로 다가온다.

더 이상 파고들 것이 없는 명약관화한 ‘한반도’라는 제목은 이 영화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

잃어버린 국새를 찾아서

남북 화합의 일보를 내딛는 경의선 개통식이 있던 날, 대한민국 대통령(안성기)은 대한제국 시절 일본과 강제로 맺은 조약에 의해 경의선에 관한 권한이 일본에 있다는 뜻밖의 소식을 접한다. 일본은 증거로 고종의 국새가 찍힌 문서를 제시한다.

한편 을사늑약 당시 국새는 가짜며 진짜 국새는 따로 있다고 주장하던 사학자 최민재(조재현)는 진짜 국새를 찾을 것을 대통령에게 호소한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는 총리 권용환(문성근)은 국정원 서기관인 이상현(차인표)을 시켜 국새 발굴 계획을 방해한다.

사라진 국새를 두고 일본과 한국 간의 신경전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는 한반도에는 전운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한반도>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핵심 전략은 병치와 교호이다.

강우석은 국새를 둘러싸고 일본과 한국이 대립하는 2006년 상황을 명성왕후가 시해당하고 고종이 고초를 겪었던 구한말과 등치시킨다. 과거 장면들은 국새를 둘러싼 현 정세를 구한말과 동격으로 느껴지게 만들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물론 전적으로 픽션에 의지한 영화라고 할지라도 이 같은 단순등치에는 무리가 따른다. 문제는 그 등치의 과정에서 옮겨오는 것이 상황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식민시대의 역사를 현재와 교호시킴으로써 <한반도>는 또 다른 의미의 식민주의를 끌고 온다. 즉, 대통령과 최민재로 대표되는 민족자주 세력과 국무총리로 대변되는 실리주의적 세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 대립하는 두 세력은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는 얘기다. 둘 모두 힘의 논리에 의해 세계가 움직인다는 걸 알고 있고 ‘애국’을 지상 최대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한반도>의 목표는 지향은 같으나 전략이 다른 두 세력의 차이를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그 고결한 목표가 드러나는 건 영화의 말미, 대통령과 권 총리의 한판 설전이 벌어진 이후부터다. 그 전까지 영화는 애국애족 세력과 매국적 사대주의자들의 한판 싸움으로 모든 걸 치장한다.

<한반도>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이데올로기는 물리적 힘에 대한 환상이며 국새는 그 환상의 결정체이다. 먼저 먹지 않으면 잡아 먹힌다는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국새는 일본을 무릎 꿇릴 유일한 무기이자, 최후의 자위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일본의 속국이 되어도 힘만 얻게 된다면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국무총리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세력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힘의 획득에 있는 까닭이다. 강우석이 영화 속에서 대통령과 최민재를 내세우되 국무총리를 악이 아닌 국가를 위하는 다른 세력으로 위치시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얕고 단순한 역사인식

국새가 존재한다는 최민재와 대통령의 믿음은 국새가 없으면 일본에게 다시 한번 지배당할 것이라는 공포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이라크에 살상무기가 있다는 부시의 음모론과 기이한 방식으로 마주친다.

자주국방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지도자의 의지는 영화 속에서 비장한 파괴의 쾌감으로 이어진다. 국새를 숨기기 위해 불태워지는 궁, 국새를 찾기 위해 사정없이 파괴되는 문화재의 이미지가 살상무기를 찾기 위해 미군에 의해 파괴되는 이라크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포크레인으로 파괴되는 구옥들과 교차되어 보여지는 이미지는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위풍당당한 전투 의지다.

<한반도>의 역사인식은 단순하다. ‘영화를 통해서라도 일본을 응징하고 그들에게 이기고 싶었다’는 강우석의 변은 그 자신의 얕은 인식수준을 자인하는 꼴이다.

그것을 가리기 위해 웅변이 동원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연사라도 되는 양, 모두 한마디씩 한다. 그들이 읊어대는 대사는 흡사 윤리책의 한 페이지를 듣는 듯, 당위론으로 치닫는다.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 일본 자위대의 뉴스릴 필름에서 자주적 국력을 상정하는 경의선 철도 개통이라는 상상으로 이어지는 이 첫 장면은 영화의 숨겨진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 모두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9.11과 이라크전이 대한제국의 사라진 국새 찾기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영화가 픽션 예술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연결이 이처럼 비약적이어서는 곤란하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