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소서노 - 연하의 동명성왕 도와 고구려 개국 뒤 배신 당해, 두 아들과 백제로 망명

최근 MBC 월화 사극 ‘주몽’이 인기다. 또한 SBS주말 사극 ‘연개소문’이 가세한 데 이어 광개토태왕을 주인공으로 한 MBC ‘태왕사신기’도 가을께 방영된다고 한다. 역사소설과 사극이 역사대중화에 기여하고, 우리 역사에 긍지와 자부심을 높이며,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고구려사를 재조명하는 현상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주몽이 총각 때 소서노(召西奴)를 만났다는 설정은 사실(史實)과 다르다. 앞에선 중국의 역사왜곡과 탈취 기도를 매도하면서 뒤로는 드라마의 재미를 핑계로 역사왜곡을 다반사로 자행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은 기가 막힌다.

소서노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뒷날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 우리 고대사 최고의 여걸이다.

그러면 무슨 까닭에 아직도 이처럼 대단한 여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가. 역사교육이 잘못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숱한 전란으로 대부분의 역사기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서노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도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 겨우 몇 줄 실려 전해온 덕분이다.

동명성왕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했고, 비류·온조 형제를 이끌고 망명하여 백제를 건국했던 실질적 여왕 소서노. 나라를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만들었던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여걸 소서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펴본다.

젊은 영웅 추모에 반한 연타발 부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본명은 추모(鄒牟). 일세의 영걸 추모가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망명할 때 그의 나이 21세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급박한 상황인지라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과 임신 중인 아내 예씨(禮氏)도 그대로 버려둔 채였다. 그를 따른 사람은 오이·마리·협보 등 심복 셋뿐이었다. 그리고 모둔곡을 지나다가 무골·재사·묵거 등 세 사람과 그 무리를 거두어 졸본부여로 들어섰다.

졸본 땅에 근거를 마련한 추모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꿈꾸던 나라, 조선과 부여의 뒤를 잇는 천손(天孫)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원대한 사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하지만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와 재물이 필요한 법. 소수의 심복과 불과 수백 명의 추종세력으로는 어림없었다.

그때 만난 여인이 바로 소서노였다. 나이는 비록 8세 연상이요, 두 아들을 둔 과부였지만 추모가 소서노를 만난 것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서노의 아버지가 졸본부여에서는 가장 강력한 토착 세력인 계루부의 부족장이며 대부호인 연타발(延陀勃)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 시집갔다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소서노의 눈앞에 어느 날 갑자기 젊은 영웅이 나타났으니 첫눈에 반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추모의 빼어난 인품, 준수한 용모, 늠름한 기상, 그리고 백발백중하는 신기(神技)의 활솜씨에 당대의 그 어떤 여자가 반하지 않았으랴.

추모는 그렇게 연타발 부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계루부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연씨 부녀의 재물을 밑천삼아 더욱 많은 인재와 백성을 끌어 모아 지지 세력을 키우며 한 해 동안 건국사업에 불철주야로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연씨 부녀의 재산과 영향력이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연상의 여인 소서노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리고 그녀의 전 남편 우태(憂台)의 소생인 비류와 온조 두 형제도 친자식처럼 대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7년 10월, 만 22세의 추모는 마침내 대왕위에 올라 고구려 개국을 선포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구려의 황후가 된 소서노도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갔다. 소서노의 나이 44세에 이르렀을 때 추모대왕은 36세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소서노는 점점 걱정이 많아지고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국력이 강해지고 대왕의 위엄이 사방에 떨치자 자연히 후계자 문제가 당면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시 4년이 지났다. 대왕은 아직도 40세의 장년, 하지만 소서노는 어느덧 48세로 노령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늙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앞날이 문제였다.

죽더라도 대왕보다는 내가 먼저 죽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내 아들 비류와 온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둘 중 누구든 왕위를 이어야 마음 놓고 죽을 수 있겠는데, 만일 동부여의 친아들을 데려와 대를 잇게 하기라도 한다면…. 생각하면 할수록 소서노는 미칠 것만 같았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소서노는 대왕에게 가서 맏아들 비류를 태자로 세워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대왕은 처음에는 좀더 두고 보자면서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 졸라대자 나중에는 들은 척도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소서노는 더욱 애가 타 기를 쓰고 졸라댔다. 사랑에 속아 몸도 주고 돈도 주고 결국에는 배신당한 연상의 여인 소서노, 비극적 운명의 여인 소서노의 그지없이 뼈저리고 살 떨리는 절망감을 그 누가 알아주랴!

대왕은 본처 예씨와 적자 유리(琉璃)가 오자마자 이미 작정하고 있었다는 듯 황후와 태자로 책봉했다. 그뿐인가. 소서노는 소후(小后), 곧 제2부인으로 강등시켰으니 졸지에 배반당한 소서노의 설움과, 하루아침에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비류·온조 두 형제의 쓰라린 가슴은 어떠했으랴.

그렇게 해서 세 모자는 고구려를 떠나 멀리 남쪽으로 가서 신천지를 개척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했다. 소서노 모자의 말을 들은 대왕은 잘 생각했다면서 많은 재물을 출국경비로 내려주기까지 했다. 동명성왕은 고구려의 창업자요 국가경영자였다. 그런 위대한 영웅이었으므로 사사로운 인정과 은원을 떠나 대제국의 먼 장래를 내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8세에 백제 망명, 형제 간 권력다툼

서기전 19년 9월. 소서노는 마침내 회한만 남긴 채 정든 고향이요 조국인 졸본부여 땅을 영영 등지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오간·마려·을음·해루·흘우 등 열 명의 심복과 그 일족, 그리고 자신의 부족인 계루부의 수많은 백성이 소서노의 뒤를 따랐다. 소서노의 나이 그해에 만 48세였고, 비류와 온조는 각각 30세, 25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그렇게 졸본을 떠나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남쪽으로 내려가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나라를 세운 곳은 대방의 옛 땅이었다. 대방은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오늘의 황해도가 아니라 만주 요하 서쪽에 있었다.

처음에는 ‘열 명의 신하가 보좌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가, ‘백가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나라를 세웠기에 국호를 백제라고 바꾸었으니 그해가 서기전 18년 10월. 망명길에 오른 지 13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건국 초기의 백제는 비류왕의 미추홀과 온조왕의 위례성으로 분립하고 만다. 우태와 추모에게 두 차례 시집갔다가 두 번 모두 실패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 소서노, 그녀의 비극은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엄청난 비극의 씨앗을 오랜 옛적에 자신의 자궁에서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제 간의 분립은 결국 아우 온조왕의 승리로 끝났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위대한 여걸이며 백제의 국모 소서노의 죽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조에 이렇게 나온다.

‘왕도에서 늙은 여자가 사내로 변하고 다섯 호랑이가 입성하니 61세의 왕모가 사망했다.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최근 사학자 가운데는 서기 6년인 온조왕 13년이란 실은 비류왕의 재위 연대인 동시에 온조가 분립한 첫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이도 많다.

일제강점기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도 ‘조선상고사’에서 ‘온조왕 13년은 곧 소서노 여왕의 치세 마지막 해요, 그 이듬해가 온조왕의 원년’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미궁과도 같은 고대사의 수수께끼는 고명하신 사학자들의 숙제로 돌려주기로 하자.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