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괴물'

봉준호의 <괴물>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건 역시 '괴물'이다.

컴퓨터 그래픽(CG)과 특수효과 스탭들에게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창적 괴물'을 창조하는 것이 고민이었고 배우들에게는 촬영장에 없는 괴물이,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 고역이었으며 마케팅 담당자에게는 할리우드의 거대한 괴물을 연상하는 관객들의 기대심리에 어떻게 호소할 것인가가 고민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더욱 심대한 고민은 감독 봉준호에게 있었다.

한마디로 이건 김기덕 감독(<섬> <빈집>의 김기덕이 아니라 1960~70년대 활동하던 원로감독 김기덕)의 <대괴수 용가리>(1967)나 심형래 감독의 <용가리>(1999), 심지어 일본의 <고지라>(1954)와도 근본이 다른 괴물영화다. 동서양 괴수영화의 관습을 슬쩍 곁눈질하면서 봉준호는 자기 식의 괴물을 창조해냈다.

<괴물>은 거대 도시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 한복판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황당한 가정에서 출발해 한국 사회의 '괴물성'으로 접근해 들어간다.

괴물이 살고 있었네

한강 고수부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박강두(송강호)의 가족은 괴이하다. 툭하면 강두를 타박하는 아버지 박희봉(변희봉)과 한때 민주투사였으나 지금은 고통스러운 실업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남일(박해일), 전국체전에서 시간초과로 마지막 화살을 쏘지 못해 통한의 동메달에 머문 양궁선수 박남주(배두나), 그리고 강두의 딸 박현서(고아성)가 그들이다.

행락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대낮의 한강변, 정체불명 괴수의 출현으로 한강은 생지옥으로 변한다. 난데없는 괴물의 등장에 우왕좌왕하는 인간들과 정체불명 괴수 사이의 생사를 건 추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현서가 괴물의 꼬리에 잡혀 사라진다. 이때부터 실종된 현서를 찾기 위한 강두 가족의 고투가 시작된다.

<괴물>에 대한 가장 큰 궁금증 중 하나는 ‘과연 괴물은 어떻게 재현될 것인가’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현 단계에서 한국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SFX 비주얼의 최고치라 해도 좋을 만큼, 괴물의 외모는 그럴 듯하다. 총 제작비 110억원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50억 원을 뭉텅 떼어 내 컴퓨터그래픽에 사용했을 만큼 괴물 재현에 들인 공은 각별했다.

‘2,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는 풍문이 나돌았을 만큼 괴물의 모양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촬영기간 못지않은 긴 시간을 후반작업에 할애해 ‘괴물다운 괴물’을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괴물의 자태는 한마디로 묘사하기가 힘들다. 가오리와 물고기, 그리고 에일리언을 섞어놓은 듯한 오묘한 모습이다. 보다 중요한 건 괴물이 어떻게 생겼는가가 아니라 ‘어떤 연유에서 생겨났는가’이다.

킹콩이나 고지라와 종자가 다른 그놈의 탄생배경은 실로 기가 막히다. 미군부대에서 남몰래 흘려보낸 '포름알데히드'라는 독극물이 한강으로 유입돼 그 몹쓸 물을 마시고 자란 물고기가 형태변형을 거쳐 탄생한 돌연변이. 그것이 괴물의 실체다.

한국 사회의 괴물성에 대한 조롱

괴물의 스펙터클 못지않게 특별한 것은 그 등장이다. 대낮에 하릴없는 한강의 풍경이 묘사되는가 싶더니, 뒤통수를 후려갈기듯 느닷없이 출현하는 '깜짝 등장'의 방식을 택했다. 더욱 희한한 것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괴물이 점점 자신의 강력함과 카리스마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괴수장르에서 괴물은 영웅적 주인공의 완전무결한 승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시간이 갈수록 압도적인 위세를 떨치는 게 보통. 하지만 이놈은 다르다. 점점 더 화면에 비쳐지는 빈도가 줄어들면서, 나중에는 존재조차 미미해진다. 오히려 괴물 역할을 하는 것은 강두의 가족이다.

괴물보다 괴물이 흘리고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이러스에 집착하는 공권력은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 강두의 가족을 감금하고 추적한다. 현서 구출을 위해 강두의 가족이 탈출하자 괴물 사냥은 온데간데없이 강두 가족의 사냥에 나서는 것이다.

<괴물>의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괴물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TV는 그 흔한 괴물의 몽타주 한 장 비쳐주지 않고 온종일 강두 가족의 행적과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설교하기에 바쁘다. 도대체 괴물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살인의 추억>에서 연쇄살인범의 실체가 묘연해진 것처럼 <괴물>에서 괴물의 정체는 점점 그 존재감을 잃어간다. 거대한 괴수의 출현으로 시작된 괴물사냥은 괴물 뒤에 어른거리는 '한국 사회의 괴물성'으로 초점을 옮겨간다.

지난 2000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앨버트 맥팔랜드 독극물 방류 사건과 바이러스로 표현되는 이라크전, 1980년대 시대상을 환기하는 이미지들(도망치는 군중들과 시위대, 화염병), '여중생 희생자'로 상징되는 미선이, 효순이의 혼령이 무작위적으로 출몰한다.

대한민국은 80년대를 상징했던 한 건전가요에 나오는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곳이다.

하늘엔 독가스가 떠 있고 강물엔 독극물이 떠 있는 괴물 같은 도시가 서울이고 한강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회, 정치적 함의는 권력의 핵심부에 타격을 가하기보다 그 모든, 비이성적인 상황과 행위들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의 괴물성을 통렬히 조롱한다.

봉준호의 전작 <살인의 추억>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비이성적 현상을 통해 파시즘적 통제가 횡행하던 아이러니한 시대의 풍경을 추억했다면 <괴물>은 외견상 평온해보이는 한강의 이면을 통해 90년대의 부조리를 응시하는 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