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감독 '다세포 소녀'

현실 속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상상만으로 즐거운 일들이 있다. 합리와 이성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믿음을 무참히 뒤집어버리는 상상의 쾌감.

<다세포 소녀>는 법이나 윤리, 도덕률 따위는 잠시 접어두고 불순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상상력, 금기에의 도전과 위반의 쾌락이 넘실대는 불량영화다. 원작자 채정택이 2004년부터 ‘B급 달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인터넷 만화 <다세포 소녀>를 원작으로 삼았다.

연출자는 <정사>, <순애보>,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이하 ‘<스캔들>’)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비교적 다소곳하게(?) 다뤘던 이재용 감독. 정숙한 중산층 주부의 은근한 일탈욕구를 모던한 화면 속에 담아낸 <정사>, 조선 시대 사대부 양반들의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을 품격 있는 스타일로 묘사한 퓨전사극 <스캔들>에서 이재용은 절제의 미학을 구사했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표현의 해방구를 통해 유통됐던 <다세포 소녀>는 이 같은 점잖음을 완전히 벗어버렸다.

원조교제·동성애 등 소재 금기 깨

원조교제와 가학, 피학증, 동성애 등 금기시된 소재를 대담무쌍하게 화제에 올리는 <다세포 소녀>는 쾌락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이상한 학교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요약된 줄거리만 보면 15세 관람가라는 관람등급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원색적이다.

원작자 채정택이 'B급 달궁'이라는 필명을 썼듯이 제작 초기 이재용 감독도 '이감독'이라는 필명을 썼다. 가짜 이름을 내세운 이유는 '이재용'이라는 이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비추어 영화를 미리 상상하지 말았으면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개봉을 앞두고 본명으로 '커밍아웃'하기는 했지만 <다세포 소녀>는 이전 이재용 영화들과 달리 경쾌하고 발랄한 19금 드라마로 태어났다.

당최 통제가 불가능한 무쓸포 고교의 아이들은 하나의 세포로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귀여운 혁명가들이다. 그들의 복잡한 정체성은 원조교제와 '사도-마조히즘’, 동성애 등 갖가지 기행들의 원천이 된다. 모두가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는 세상에서 가난을 등에 짊어진 소녀와 외눈박이 소년의 행복은 멀게만 보인다.

자본과 권력, 외모, 이성애 등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기준은 학교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불행하고 불쌍한 존재는 못 가지고, 못 띄고, 못난 이 아이들만이 아니다.

딜레마에 빠지기로는 무려 178명의 여자친구가 있고 하루에 8,900통의 문자를 받는, 잘 나고 많이 가진 스위스에서 전학 온 꽃미남 안소니 라고 다르지 않다. 안소니는 외눈박이의 남동생에게 연정을 품고 성정체성의 혼란에 빠진다.

뮤지컬·시대극 요소 부분 도입

다세포의 눈으로 본 세상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중무장한 원작의 상상력을 어디까지 살려낼 것인가가 영화 <다세포 소녀>의 고민이자 관심거리였다. 언뜻 보기에도 <다세포 소녀>의 이야기는 황당하고 불순하다. 신성한 교육의 성지 학교를 온갖 욕망과 쾌락의 소굴로 묘사하는 이 영화의 도발은 삐딱하기 그지없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대한민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학문에 힘쓰고 있는 마당에 무쓸포 고등학교의 엽기 소년, 소녀들은 몹쓸 상상에 빠져 있다. 원조교제를 위해 조퇴하는 학생에게 “늦지 않았니?’라고 친절한 충고를 잊지 않는 교사가 있는 학교. 정말 이런 학교가 있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또 즐거울까?

인터넷 만화에서 영화로의 매체 이행만 놓고 보자면 그리 매끄럽지 않다. 하나의 줄기를 따라가는 일관성 있는 드라마보다 인터넷 만화 특유의 에피소드식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까닭에 드라마의 맥이 끊기는 감이 없지 않다. 인터넷 만화의 미덕이라 할 ‘스크롤의 미학’을 스크린 위에 완벽히 번역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한없이 가벼운 농담으로 위선에 찬 세상을 능멸하는 유희정신만은 올곧게 살려내고 있다. 동일자와 타자, 정상성과 비정상성, 법과 금기의 경계를 희롱하는 발칙한 도발은 쾌락을 추구하면서 한편으로 그것을 부정하려는 이중성을 통렬히 비웃는다. 학교, 성적 소수자, 물신주의, TV, 인터넷 등 조롱의 대상도 성역이 없다.

장르파괴도 거침이 없다. 뮤지컬과 시대극을 부분적으로 도입한 파괴적 스타일도 현대무용가 안은미와 복숭아 프로젝트 장영규의 참여로 힘을 받았다. 금기와 가식, 위선으로 손과 발을 옭아매려는 단세포 세상을 향한 다세포 소년, 소녀들의 도발은 귀엽다.

성장과 교훈이라는 뻔한 도식으로 흐르는 10대 학원영화의 관습은 안중에도 없다. 가난하지만 선하고 심지가 굳은 주인공이 숱한 역경을 딛고 인정을 받게 된다는 따위의, 10대 영화의 법칙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실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