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던 여름도 이젠 끝물이지만 포도는 한창 물올랐다. 포도가 들어갈 무렵이면 단맛은 닮았지만 조금은 신성하기도 한 특별한 맛의 머루포도가 나온다. 그리고 그마저 퇴장하는 깊은 가을이면 우리 산야엔 머루가 검붉게 익어갈 것이다.

머루포도는 포도와 야생하는 머루의 교잡종을 심어 출하시기를 늦춘 과일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세상의 다양한 포도도 결국은 모두 야생 머루나 그 형제들의 유전자를 지니며 사람 입맛에 맞게 개량된 것이 아니겠는가. 어디 그뿐이랴, 철마다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든 과일과 야채도 그 시원(始原)을 거슬러가면 야생 식물에서 온 것이다.

요즈음 산에 가면, 숲이 우거진 탓에 머루를 만나기란 무척 어려워졌다. 그래도 운 좋으면 송알송알 청포도처럼 여물어가고 있는 머루 구경이 가능하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라고 하면, 먼저 고려가요 ‘청산별곡’이 저절로 입안에서 읖조려진다. 그 머루랑 다래가 푸른 하늘과 단풍 들어 붉은 산과 함께 어우러졌으니 ‘청천홍산별곡(靑天紅山別曲)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나처럼 산을 자주 찾는 사람도 머루나 다래의 맛을 볼 기회는 좀처럼 많지 않다. 간혹 꽃이나 설익은 열매는 보았어도 때마침 잘 익어 먹음직한 열매는 내 차례까지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머루는 포도과에 속하는 덩굴성 목본 식물이다. 우리의 국토 어느 곳에서나 자란다. 가까이에 있는 나무를 타고 이리저리 휘감기도 하고 제 풀에 혼자 둘둘 말려 가며 자라므로 머루의 정확한 키는 알 길이 없지만 길이는 보통 10m까지 달한다.

큼지막한 하트 모양의 잎에는 크고 작은 톱니가 거칠게 나있는데 이 잎과 마주 보고 꽃이 달린다. 꽃차례 아래에는 돼지꼬리 처럼 돌돌 말린 덩굴손이 자란다. 6월쯤이면 손가락 길이쯤 되는, 고깔모자처럼 뾰족한 꽃차례에 연두색과 노란색을 섞어 놓은 듯한 작은 꽃들이 달린다.

그리고 열매는 포도와 거의 비슷하지만 크기가 좀더 작고 빛깔이 더욱 진하다. 머루의 빛깔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검은색이면서도 보라색과 푸른색이 감도는, 표면에는 백색의 가루가 조금씩 묻어날 듯도 하여 머루의 그 싱그러운 색을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

머루 형제들의 학명 가운데 속명은 바이티스(Vitis)인데 이는 생명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고어 비타(Vita)에서 유래되었다. 기독교에서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며 천주교 미사 때의 포도주와 관련되어 지어진 이름일 것이다. 물론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바이타민 역시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머루는 그 이름에서 우리가 가지는 친근함만큼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 황제가 포도주를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과 함께 고려 시대의 이색의 ‘목은집’ 에도 포도가 등장한다.

조선 시대에는 포도가 이미 보편적인 과일로 재배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포도에 밀려 제 기량을 마음껏 과시할 기회를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수로 포도가 쓰였는데 7월에는 청포도, 9월에는 산포도를 이용했다고 하니 이때의 산포도는 머루이리라.

열매를 과실로 먹거나 술을 빚어 먹는 일이 가장 손쉬운 식용 방법이다. 어린 순이나 잎을 먹기도 한다. 나물로 먹기도 하고, 튀김을 해먹기도 한다. 동의보감에 약으로 쓰인 기록이 나온다. 머루는 줄기가 지팡이를 만드는 데 쓰여진 터라 산에서 많이 없어지곤 했다. 오래 동안 잘 자란 구불한 줄기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다니면 산신령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숲속에서 식물들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데 신맛을 장기로 한 머루와 독성을 특기로 한 천남성이 결승전에 올라갔다. 결국 머루가 승리를 하였고, 그래서 지금도 머루는 으쓱한 기분에 다른 나무 줄기를 타고 높이높이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늘도 숲속에서는 가을을 맞는 파란 하늘빛을 머금은 머루가 검푸르게 익어갈 것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