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꽃

수목원을 거닐다 자원봉사하시는 두 분을 만났다. 나이도 모습도 전혀 어울릴 듯싶지 않은 두 분이 정답게 가을 바람과 나무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쩜 하루가 다르게 계절이 바뀌고 있는지, 대기의 느낌으로 알겠다고, 그리고 기분좋게 마른 공기가 코끝에 닿으면 아늑하니 기분이 맑아지고 달콤함마저 느껴진다고…. 작은 꽃 한 송이,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잎새 하나도 소중하게 보게 된다고…. 그분들 말처럼 조락을 준비하는 맑은 가을은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아름다움의 성전(聖殿)이다.

가을에 떠오르는 꽃들이야 많지만 그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투구꽃 생각이 났다.

투구꽃은 국화과 식물 일색인 가을 숲속에서 그 특별한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신비한 보랏빛이며 독특한 꽃 모양, 덩굴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로 서지도 않은 채 비스듬히 자라는 자태. 워낙 특이하여 이 식물을 한 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고 다시 눈여겨 보게 된다. 이내 이름이 궁금해지며, 투구꽃이란 말을 듣곤 고개를 끄덕인다. 꽃잎이 투구처럼 생겼으니 말이다.

투구꽃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다른 물체에 기대어 비스듬히 자라는 것을 바로 세워보면 높이는 1m를 조금 넘기도 한다. 잎은 전체적으로는 둥글지만 손바닥처럼 깊게 다섯 혹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다. 꽃은 9월쯤 피기 시작하여 10월이면 어디에서나 절정이다. 길이가 3cm도 더 되는 꽃송이들이 이삭 모양으로 모여 달린다.

투구꽃은 약용식물로 유명하다. ‘초오(草烏)’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깊은 산에 가면 약으로 쓰기 위해 이 식물의 덩이뿌리를 캐고 다니는 약초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식물이야말로 ‘잘 쓰면 약이요 잘못 쓰면 독’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다.

초오는 진통, 진경의 효능이 있어 신경통, 두통, 위와 배가 차고 아픈 증세 등에 두루두루 처방되는 좋은 약재이지만 약재로 쓰는 바로 그 덩이뿌리에 맹독 성분이 함께 있으므로 전문가의 처방없이 그저 약초라는 이름만 듣고 복용하다가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사약을 만드는 그 유명한 부자 역시 이 투구꽃과 형제가 되는 식물인 것만 보아도 투구꽃의 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는 이 식물의 독을 뽑아내 화살촉이나 창 끝에 발라 독화살, 독창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투구꽃에는 재미나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흔히 식물이라고 하면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하겠지만 투구꽃은 그런 고정 관념을 깨게 한다. 그렇다고 동물처럼 발이 달려 이동하는 것은 아니고, 아주 조금씩 조금씩 그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 까닭은 이렇다. 투구꽃에는 큼직한 괴근(덩이뿌리)이 달리는데 1년간 충실히 제 몫을 다한 올해의 뿌리는 그대로 썩고 이듬해에는 그 옆에 있던 뿌리에서 새싹이 나오게 되니 자연히 두 뿌리 간격만큼 옆으로 이동하는 셈이다. 생각해 보면 한자리에서 몇 년씩 양분을 빨아들이는 것보다는 옆의 토양이 더 기름질 테니 투구꽃으로서는 아주 현명하게 살아가는 생존전략을 갖고 있는 것이다.

투구꽃도 피고, 구절초니 산국이 향긋한 가을이 오고 있어 너무 좋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