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범구 감독 '뚝방전설'

영화 <친구>의 말미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조직폭력배들의 암투 과정에서 동수(장동건)를 살인 교사한 혐의로 투옥 중인 준석(유오성)을 면회 온 상택(서태화)이 준석에게 법정에서 순순히 살인 혐의를 고백한 이유를 묻는다. 상택의 질문에 대한 준석의 대답은 “쪽팔려서”이다.

삶과 죽음의 기로를 오가는 지엄한 그 순간에도 체면을 생각하는 게 수컷들의 거부할 수 없는 본성이다. <뚝방전설>의 위태롭기 짝이 없는 청춘들도 마찬가지다. 현실은 보잘 것 없지만 곧 죽어도 시시하게 살고 싶지는 않는 그들의 자존심은 그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연을 전설로 둔갑시킨다.

<뚝방전설>은 실제로는 죄다 허풍이고 소설이었을지언정 찌질하게 살기보다 폼 나는 판타지를 원했던 우리들의 지나간 시절을 회고하게 만든다.

옛날옛적 뚝방에서

박정권(박건형), 기성현(이천희), 유경로(MC몽)는 외모도 성격도 다르지만 친구다. 그냥 친구도 아니고 허구한 날 싸움질로 바람잘 날 없는 ‘싸움 친구’다. 중량고등학교 동기동창생인 세 친구는 학교를 주름잡던 ‘물레방아파’를 물리치고 지존으로 등극한다. 학교 너머 동네 뚝방까지 진출한 이들은 뚝방의 터줏대감인 ‘뚝방파’를 무찌르고 새로운 조직 ‘노타치파’를 결성한다.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노타치파의 시대도 저물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세 친구는 각자의 길을 간다. 정권은 더 큰 물에서 놀기 위해 폭력조직 ‘상춘이파’에 몸을 담고, 성현은 지방전문대를 졸업한 뒤 평범한 생활인으로, 입담 좋은 경로는 노래교실 강사로 불철주야 아줌마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중이다. 뚝방의 주인도 바뀌었지만 출소한 정권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전설의 노타치파가 재결성된다.

<뚝방전설>은 한국 청춘영화 또는 조폭영화의 계보를 집대성한 완결편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극중 인물의 대사를 통해 <친구>와 <비트>가 언급되고 <게임의 법칙> <말죽거리 잔혹사> 등의 영화가 자연스럽게 연상되기도 한다. 10대 학원 장르 또는 조폭 장르의 자기반영성을 보여주는 이런 요소는 주먹 하나로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던 불우한 시절의 기억들을 그 위에 차근차근 포갠다.

저예산 독립영화 <양아치 어조>에서 실감나는 강북 양아치들의 세계를 그렸던 조범구 감독은 비루한 양아치들의 삶과 다를 게 없는 청춘들의 치열한 성장담으로 되돌아왔다. 사실 <뚝방전설>은 중랑교를 무대 삼아 ‘화려한 시절’을 보낸 바 있는 조범구 감독의 과거 이력에 대한 자전적 되돌아보기를 담고 있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19년 지기 친구 박수진 작가와 조범구 감독은 영화 속 노타치파 친구들처럼 함께 주먹질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한때의 ‘전설’이었다. 출구 없는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답답함을 주먹에 실어 보냈던 과거를 성찰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감독은 결코 주먹과 힘의 논리에 따라 영화를 끌고 가지 않으며 조폭세계를 미화하지도 않는다.

주먹의 전설은 없다

왕년에 전설 아니었던 청춘이 있던가? 공부는 뒤에서 놀아도 싸움만큼은 앞줄에 서고 싶었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다.

어느 학교에나 구전으로 회자되는 ‘17대1 싸움의 신화’나 ‘전설의 싸움고수’에 대한 전설 따위는 그 시절의 남성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다. 공부 잘하는 샌님 소리 듣기보다 주먹 하나로 또래들을 발 아래 두고 싶었던 치기어린 수컷의 본능. 그 본능 앞에서 추억은 전설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뚝방의 무용담은 ‘전설’이 아니다. 전설로 포장하고 싶고 전설로 남겨두고 싶은 남루하기 그지 없는 청춘의 한 시절일 뿐이다. 뚝방이라는 공간은 이 같은 과장된 남성성이 응집된 장소다.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기 위해 영역표시를 하는 동물 세계 수컷들처럼 뚝방을 사이에 둔 쟁탈전은 남성적 세계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논리’를 은유한다.

하지만 전설이 전설인 이유는 현실 속에서 일어날 수 없는 도달할 수 없는 신화이기 때문이다. 뚝방 너머 세계에 더 잘 나가고 더 센 놈들이 그득한 것처럼, 찌질한 삶을 벗어나기 위한 가련한 청춘들의 몸부림은 더 큰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그러니 이 영화에 진짜 전설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전설은 추억하기 좋을 정도의 환상과 이야깃거리 정도로 남겨두는 게 좋다.

<뚝방전설>은 단순히 한국사회에 고유한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영화만은 아니다. 노타치파 친구들의 엇갈린 운명처럼 그럴 듯 해보이는 남자의 로망은 언젠가 산산이 부서지고 말 부질없는 신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적 판타지로서의 ‘싸움의 전설’이 유독 한국사회에서 길고도 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을 파고들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한국영화가 주먹세계의 폭력과 상대를 제압해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대결의 세계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이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신화의 허구성과 전설의 몰락을 묘사하려는 야심의 크기에 비해 영화의 주제가 확장하는 폭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거창한 의미부여가 아니더라도 <뚝방전설>은 볼 만한 청춘영화다. ‘성장’이라는 청춘영화의 영원한 주제를 풀어내는 매끈한 연출과 공들여 촬영한 다양한 액션장면의 쾌감, 박건형, MC몽, 유지태 등 재능 있는 배우들의 헌신적인 연기를 보는 맛도 여느 영화 못지않다.

지나간 시절의 추억을 환기하는 솜씨 좋은 감독의 재주를 감상하는 정도로도 즐길 만한 대중영화의 미덕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