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 데이비스 D. 조이스 지음 / 노암 촘스키 서문 / 안종설 옮김 / 열대림 발행 / 1만6,800원

인상적인 제목의 미국 비판서 <오만한 제국> 저자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진보 사학자 하워드 진. 올해로 84세(1922년생)가 됐지만 여전히 정력적으로 세계의 변혁을 부르짖고 있다. 그를 다룬 평전이 번역 출간됐다. 역사학자 데이비스 조이스가 집필하고 노암 촘스키-진의 명성에 못지않은 진보학자이자 절친한 친구이다-가 서문을 쓴 2003년도 책이다.

뉴욕 빈민가 출신에 2차대전 때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진의 특이한 이력에 호기심을 가진 독자에겐 이 책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노학자의 사적인 생애보다는 저술과 공적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이 급진주의를 평생 견지했다는 게 필자의 논지이다보니 평전에서 기대함직한 ‘극적인 회심’ 따위도 언감생심이다. 반면 진의 사상이나 저술을 체계적으로 접하고 싶은 독자에겐 훌륭한 길라잡이가 될 듯싶다.

첫 장은 진이 1956년 대학 교수가 되기 전까지 33년간의 삶을 개괄한다. 가난한 유대인 집안의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그에게 세상은 열악하고 침울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평생 열심히 일했지만 돈은 많이 벌지 못했고, 자주 옮겨 다녔던 월셋집엔 요금을 못 내 전기가 끊어지기 일쑤였다.

결혼하고 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강사로 시작한 교편생활은 막노동하다 허리를 다친 후 찾은 호구책이었다. 덕분에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렸지만 그는 “결코 그 세계를 잊지 않았고, 한번도 계급의식을 버리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2장부터 필자는 진의 저작을 연대기순으로 분석하면서 공적인 활동을 아울러 언급하는 구성을 취한다. 진의 첫 번째 책은 <의회에서의 라과르디아>로, 뉴딜 시대에 뉴욕시장을 지낸 개혁 정치인 라과르디아를 분석한 것이다. 이 처녀작은 미국역사학회상을 받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필자 표현을 빌면 “마지막 정통 역사학 논문”이기도 했다.

진이 교수 생활을 시작한 스펠먼 대학은 흑인 여성-제자 중엔 소설가 앨리스 워커도 있었다-들이 다니는 학교로 그는 곧 학생들과 더불어 민권운동의 대열에 동참한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대학측으로부터 재직 7년만에 해고 통보를 받을 때까지 진은 두 권의 책을 더 쓰는데, 그에게 글쓰기는 이미 ‘객관적 연구’가 아닌 ‘세계의 변혁’을 위한 것이 됐다.

보스턴 대학에 부임한 후에도 진은 정부와 기득권에 대항한 비판과 행동에 매진한다. 때마침 존슨 정부는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을 개시했고, 진은 유명한 <베트남-철군의 논리>를 출간하며 60년대 반전운동의 선봉에 선다.

“베트남은 부조리극이 공연되는 극장”이라고 운을 뗀 100쪽 남짓한 이 책에서 그는 다양한 진술과 통계를 인용하는 특유의 글쓰기 전략으로 미국 외교정책의 치부를 폭로했다. 이듬해 펴낸 <불복종과 민주주의>에서는 “시민의 임무는 법보다 양심을 앞세우는 것”이라며 부당한 법의 지배에 저항하는 ‘시민 불복종’을 제안한다.

스스로 가장 맘에 드는 저서로 꼽는 <역사 정치학>과 <미국 민중사>는 각각 70년과 80년에 쓰였다. 특히 <미국 민중사>는 지금까지 100만권 이상 팔리면서 비판 지식인으로서 진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책이다. 인디언, 흑인 노예, 아일랜드 이민, 여성, 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의 관점에서 미국사를 서술하면서 그는 60, 70년대 이래 활발해진 저항운동이 각성한 중산층과 결합한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멋진 세상”이 이뤄지리란 전망을 내놓는다.

88년 은퇴한 이후로도 진은 저작활동에 소홀하지 않으면서 걸프전쟁, 9·11테러, 이라크전쟁 등 미국의 팽창주의가 발흥하는 현안마다 꾸준히 비판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실 그에게 역사학이란 도덕적 사회로의 이행에 힘을 싣기 위한 ‘도구적 지식’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학자이기 앞서 행동가, 그것도 진보의 가능성을 한없이 낙관하는 행동가라 할 만하다.

아참,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미국 민중사>가 호의적으로 언급된 사실을 아시는지. 이 영화의 각본과 주연을 맡은 맷 데이먼과 진의 친분 때문인데, 두 사람의 흥미로운 인연은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