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연애는 영화화하기 가장 만만한 소재다. 동서고금의 모든 이야기 장르에서 ‘연애’가 빠지는 경우는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영화의 8할 이상이 본격적인 연애담이거나, 양념으로라도 로맨스가 얹어지기 마련이다.

김해곤 감독의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하 ‘연애참’)은 본격적인 연애담이면서도, 건실한 생활과 거리가 먼 ‘잉여 인간’에 대한 예찬이기도 하다. <연애참>은 <파이란>의 시나리오를 쓰고 <라이방>, <달콤한 인생> 등 다수 영화에 출연했던 김해곤의 감독 데뷔작이다.

1998년 영진위 시나리오 공모 당선작인 김해곤 감독의 원안 시나리오의 제목은 <보고 싶은 얼굴>.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는 트렌디한 로맨틱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제목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유복하지만 제멋대로 삶을 살아온 고깃집 아들과 인생 막장에 선 룸살롱 아가씨의 지순하고 징글징글한 사랑이야기다.

<연애참>은 로맨스 그 자체보다는 그들의 사회적 위치, 인간적인 솔직함에 더욱 무게를 둔다. 사실 연애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아웃사이더라는 일정한 사회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간들에 대한 낭만적인 고찰에 가깝다.

이 죽일 놈의 사랑

고깃집을 운영하는 홀어머니를 거들며 사는 반백수 영운(김승우)은 그와 비슷한 상태에 놓인 껄렁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하릴없이 살아간다. 어느날 근처 룸살롱 아가씨 연아(장진영)가 단도직입적으로 작업을 걸어온다.

결혼할 약혼녀까지 있는 몸이지만, 연아의 유혹이 싫지 않았던 영운은 대책없는 연애를 시작한다. 불장난으로 시작한 연애는 좀처럼 진화되지 않는다. 아웅다웅하면서도 결코 헤어지지 못하는 이 기묘한 연인들의 행복은 영운의 어머니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면서 서서히 위기를 맞는다.

영운의 어머니는 약혼녀 수경과 영운의 결혼을 강행하고, 졸지에 유부남이 된 영운은 비밀스럽게 이중생활을 계속한다. 그러나 사랑과 질투, 애정과 증오 사이를 오가는 이들의 관계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

<연애참>에서 연애는 가볍지 않고 무겁다. 연애와 가정 어느쪽도 버리지 못하는 남자와 그 남자에게 목숨을 건 여자의 사랑이야기가 가벼울 리 있나? 더군다나 이들의 연애는 사회적 지위와 주변의 비난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끈덕지다.

이 영화의 개성이자 장점은 두 남녀의 끝이 보이는 사랑이야기에 얹어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변두리 인간들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파이란>과 <라이방>의 정서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파이란>보다는 덜 하지만 여전히 부적응형 인간이 등장하며, <라이방>처럼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스스로 "잘난 사람들을 그리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김해곤 감독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연애참>에서 지리멸렬한 인간군상들의 기이한 결속력을 그려낸다.

마마보이 기질이 다분한 영운과 욱하는 성질을 버리지 못하는 룸살롱 아가씨 연아뿐만 아니라, 아버지 공장에 들락거리면서 돈을 훔쳐오다시피 하는 영운의 친구, 영운처럼 룸살롱 아가씨를 사귀며 그녀에게 사채까지 얻어오게 만드는 또 다른 친구 등 <연애참>의 등장 인물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건실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연애참>은 이런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언뜻 패륜적 인간말종으로 보이는 이들은 결국 자신의 마음 하나 다스릴 수 없는 영운처럼 측은한 인간의 초상이 아니겠냐고 묻는다.

영화의 초반부, 주변에 적당히 기생하며 살아가는, 어른이 되기 싫은 피터팬 증후군 환자들의 삶이 정감 있게 묘사된 것은 그 안에 감독 자신의 삶과 경험이 깊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해곤 감독은 이 같은 주변인의 모습을 낭만적으로밖에 묘사하지 못한다.

사랑과 증오의 이중주

<연애참>은 사실적인 캐릭터나 디테일한 일상 묘사라는 측면에서 대단한 흡인력을 보여주지만 이들을 다루는 감독의 지나치게 사적인 관점은 주제의 객관성과 균형을 심하게 흐려 놓는다. 영운-연아 커플의 절대사랑과 주변인물들의 낙관적 쾌락주의가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영화상으로는 부족하다.

결정적으로 '이야기꾼'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김해곤의 능력은 그에 부합하는 영상을 구현해내는 연출력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결혼을 앞둔 영운과 연아가 화려한 웨딩 복장을 하고 오픈 카에 올라 시골길을 달리는 판타지 장면은 절박한 연인들의 소망을 형상화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라 노래방 기계 배경화면에서 보았음 직한 생뚱맞은 영상으로 분위기를 깬다.

<연애참>은 날 것의 사랑이야기라는 낭만적인 소재를 고색창연한 방식으로 다룬다. 정서가 올드한 것은 좋으나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까지 올드해서는 곤란하다. 치명적인 약점은 멜로드라마 장르가 가진 이중의 힘을 간과한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소재와 주제를 선택하되 그 안에서 인간사의 정수를 뽑아내는 것은 통속극의 힘이다. <연애참>은 통속극의 질펀한 정서는 있으나, 통속의 정서를 인간 삶의 한 부분으로 연결시키는 데는 실패한다.

목적 없이 살아가는 백수나 다름없는 건달들의 삶을 필요 이상으로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감독의 시선'으로서는 모자라다. 그러한 시선은 그 생활을 직접 즐겼고 그리워하는 사람의 관점일 뿐이다. 감독이 지나치게 영화에 몰입한 작품은 설득력을 얻기 쉽지 않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