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왜나무

오랜만에 제주도에 야외조사를 다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이국의 정취가 가득한 관광 낙원으로 보이겠지만 내게 그 섬은 더할 수 없이 진귀한 ‘식물의 보고(寶庫)’이다. 길이 없음은 물론이고 걸음을 디디기도 벅찬 용암으로 이루어진 계곡, 밤처럼 어두운 곳자왈 상록수림을 헤매며 오직 그 땅에서만 살아가는 식물들을 만나는 기쁨이란. 상상만 해도 즐겁다.

계곡고사리, 일엽아재미, 섬꿩고사리, 푸른각시고사리…. 요즈음 양치식물을 연구하고 있는데 이번 야외조사에서 발견한 이름도 곱디고운 귀한 식물들이다.

이렇게 침침한 숲속을 찾아다니다 문득 전망이 트여 맑고 깨끗한 하늘이 보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눈길을 끄는 나무가 있다. 아왜나무이다. 아왜나무는 제주도 같은 따뜻한 곳에서만 자라는 넓은 잎을 가진, 하지만 늘푸른 나무이다. 상록수는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라는 선입견을 한순간을 날려버리게 하는 나무다.

사실 아왜나무를 안 것은 아주 오래 전이고, 이 나무가 꽃도 풍성하고 붉은 열매도 강렬하여 아주 좋다는 것을 깨달은 건 한참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유난히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계절 탓이 아니었을까 싶다.

열매들이 풍성하기엔 너무 이르고, 많은 꽃들을 즐기기엔 시간이 너무 흘러버린 아주 어정쩡한 이맘때, 반질반질 건강하게 윤기나는 잎새에 붉디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나무가 바로 아왜나무이기에 눈에 번쩍 띈 것이리라.

그런데 요즈음 이 아왜나무가 이러저러하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이유인즉 한 TV 프로그램에서 누군가가 “아! 왜~ ”라는 말을 유행시킨 덕분에 ‘아왜’나무란 이름이 갑작스럽게 재미있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하지만 아왜나무란 이름의 진짜 유래를 알고 나면 마냥 재미있어 할 일도 아닌 듯하다.

아왜나무는 나무 자체에 수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불에 잘 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이 붙으면 수분이 빠져 나오면서 거품을 만들고 이 거품이 일종의 나무 표면에 차단막을 만들어 불에 잘 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거품내는 나무라는 뜻을 가진 아와부끼나무라고 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발음의 일부를(제대로도 아니고) 차용해 아와나무라고 부르다가 아왜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소 서글프기까지 하다. 그동안 정말로 좋은 우리나무를 제대로 눈길 한번 주지 않다가 일시적인 유행어에 약간의 조명을 받았으나 그나마 다행이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나무 이름 하나 주체적으로 갖지 못한 슬픔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이 좋은 나무, 제대로 알아주고 사랑하면 진정한 우리나무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만일 따뜻한 동네에 살고 있다면 조경수로 심으면 좋을 것이란 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다. 한 그루씩 심어도 좋지만 생울타리를 만들어도 멋지다. 보통 키가 5~6m까지 크며 조건이 맞으면 더 크기도 한다.

꽃은 6월쯤 핀다. 약간 붉은빛이 섞인 흰색이다. 작은 꽃들이 모여 주먹보다 더 큼직한 꽃차례를 만든다. 지금 붉디붉은 열매는 가을이 깊을수록 검은 빛으로 변해간다. 내겐 무엇보다도 그 반질거리는 건강한 잎이 좋다.

불을 막는 방화수로 심기도 하며 많이는 아니어도 한방에서 타박상이나 류머치스 치료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에는 거창한 외교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소중히 알고 제자리를 찾아 주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