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니뇨 : 역사와 기후의 충돌 / 로스 쿠퍼-존스턴 지음 / 김경렬 옮김 / 새물결 발행/ 1만7,900원

2차대전의 전황을 역전시킨 히틀러의 소련 침공 실패. 당대 최고 호화 여객선에 올라탄 1,513명을 수장시킨 타이타닉호 침몰. 적국의 저력을 과소평가한 히틀러의 경솔함과 최단 시간 내 대서양 횡단이란 목표에 눈 먼 선원들의 과욕에 책임을 묻고 있는 대사건들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단호하게 답한다. 이 대형 참사들의 배후엔 엘니뇨가 있다고. 나치 독일군의 발을 묶은 1941년 10월의 진창과 타이타닉호를 무참히 가라앉힌 단단한 빙산은 예측 불가한 기상 이변이 빚은 살풍경이었다고.

엘니뇨가 닥치는 해에 벌어지는 기상 변화를 대별하면 동태평양 지역의 홍수와 서태평양 지역의 가뭄으로 요약된다. 페루, 에콰도르와 같은 남미 연안 지역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수온이 오르면서 어획량이 급감한다. 생태계에는 먹이사슬이 끊어지고 인간 사회 역시 심각하게 동요한다.

일례로 페루에서 많이 잡히는 안초베타(멸치류의 작은 물고기)가 1972~1973년 엘니뇨로 인해 어획량이 크게 줄자, 북미 축산 농가는 콩을 대체 사료로 대거 사들였다. 그 통에 애먼 한국마저 콩값 파동에 몸살을 앓았다. 반면 서태평양 지역은 우기에도 비가 안 내리는 당혹스런 상황을 맞게 된다.

20세기 최대 엘니뇨의 해로 꼽히는 1997년 9월 인도네시아 칼리마탄과 수마트라에서는 초대형 화재가 일어나 170만ha의 숲이 잿더미로 변했고, 그로 인해 생긴 ‘갈색 구름’은 이 지역 기상 이변을 심화시켰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생태계는 예측 불허의 엘니뇨에 대비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다. 에콰도르령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서식하는 바다이구아나는 엘니뇨로 먹이인 해조류가 부족해지면 연골 조직을 흡수해 몸집을 줄인다. 엘니뇨 때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호주의 텃새와 철새들은 고난의 시기에 개체 수의 12% 가량이 번식을 포기함으로써 호혜적인 식량자원 분배 시스템을 구축한다.

생존의 기술을 발휘하는 건 인간도 마찬가지. 많은 원시 부족들은 이웃 간의 경제적 유대를 통해 기상 이변의 위협에 대비한다. 풍요로운 시기엔 상대 부족에 선물을 제공하고 어려울 땐 그것을 징표 삼아 원조를 기대하는 칼라하리 사막의 쿵 부시맨의 관습은 다양한 사례 중 하나다.

이 책은 나아가 역사 속 대격변의 숨은 동인에 엘니뇨를 대입하는 신선한 관점을 선보인다.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 이달고가 일개 수도사임에도 불구하고 1810년 10만명의 봉기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태 전부터 닥친 극심한 가뭄에 이어 그 해에 엘니뇨까지 겹친 탓이란 분석이다. 이 나라가 철권통치자 디아스를 몰아낼 수 있었던 것도 기후의 힘이었다. 1908~1910년 라니냐로 인해 큰 가뭄이 든 멕시코 북부는 마데로, 판초 비야 등 혁명 리더들에게 세 확장의 터전을 마련했다.

중국사의 구비구비에도 엘니뇨가 자리잡고 있다. 명나라의 멸망은 1640~1641년에 발흥한 엘니뇨로 인한 대기근에서, 청나라의 몰락은 서구 열강에게 구호라는 침탈의 명분을 제공한 1877~1878년 엘니뇨 피해에서 비롯된 바 크다는 게 필자의 진단이다.

20여 년간 엘니뇨에 천착해온 필자의 공력이 느껴지는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이 뽐내듯 구축해놓은 이 세계가 얼마나 불확실한 기반 위에 얹혀있나를 절절히 깨닫게 된다.

1997~1999년 엘니뇨-라니냐 콤비가 대활약을 했을 때 한국 또한 폭설과 폭우에 엄청난 인명·재산 피해를 경험한 바 있다. 엘니뇨가 적도 부근의 기상 현상이라지만 그 여파에서 자유로운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올 여름부터 남미 연안 수온이 높아지고 태평양의 해양-대기 패턴이 심상치 않은 게 연말에 엘니뇨를 맞닥뜨리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인해 부디 ‘소년’이 곤한 잠에서 깨지 않길.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