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테라 作

나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네 번 읽었다. 송동준의 독일어판 번역으로 두 번, 이재룡의 불어판 번역으로 두 번.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그 사이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미 충분히 유명한 소설이다. 세계적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고전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국내 서점가에서도 스테디셀러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하여 이 글을 쓰는 의도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단순한 소개나 리뷰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같은 소설을 네 번이나 읽었다는 것을 우쭐해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뭐 그렇게까지나’, 핀잔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일지 모른다.) 반복된 독서에 거창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소설이라 생각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소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작은 소설이 아니라 영화였다. 갓 고등학생이 되었던 어느 봄날의 휴일. 친구들과 함께 중학생 시절 흠모했던 영어선생을 만나러 갔다. 영어선생은 ‘몰라보게 어른스러워졌다’는 말로 우리를 반겼다. 물론 중학교를 졸업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그럴 리는 만무했지만, 더 이상 어린 소녀이고 싶지만은 않았던 나와 친구들은 그 말을 믿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중국요리를 먹고 영화를 보러 갔다. 복합상영관이 없던 시절, 가장 가까운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던 영화는 <프라하의 봄>이었다. 그때는 물론 그 영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지 못했다. 영어선생은 알고 있었을까. 유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니만큼 ‘몰라보게 어른스러워’진 제자들과의 관람이 교육적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을까.

나는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프라하의 봄>에 대해 유일하게 알고 있던 사실은 몇 개월 전 개봉 당시에는 분명히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다는 것이었다. 상영 극장이 바뀌며 어떻게 해서 ‘고교생이상 관람가’가 되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시작된 영화, 극장 좌석은 반 이상 비어 있었다.

영어선생이 우리와 서너 칸 간격을 두고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크린 속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줄리엣 비노쉬의 스웨터를 능숙한 솜씨로 벗겨냈다. 남자의 이름은 토마스, 여자의 이름은 테레사. 기차를 타고 무작정 토마스를 찾아온 테레사. 그곳은 프라하. 테레사는 고열에 시달리며 끙끙 앓는다. 뺨이 더할 수 없이 빨갛다. 삶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전조(前兆). 혹은 전조 그 자체인 삶.

고등학생이 되어 중학생 때 좋아했던 학교선생과 함께 관람하기에 적절한 영화는 분명 아니었다. 처음에는 베드신이 잦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는 미성년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모든 성년들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그러나 불편했던 만큼 나는 충분히 예민해져 있었다. 몇몇 장면들이 마음속을 휘저었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만났던 그날, 나는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헤어진 셈이 되었다.

토마스를 찾아온 테레사의 손에 쥐어져 있던 책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라는 것을 나는 몇 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영화가 끝났을 때 영어선생은 잠들어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을 반쯤 벌린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딱히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게 된 것은 아니었다. 십여 년 전, 그래도 대학생이라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 <악의 꽃>, <백 년 동안의 고독> 같은 제목의 작품들을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지적 허영에 불과한 것이었다 해도, 지금처럼 <7급 공무원 수험서>나 <젊은 날 시작하는 재테크> 등이 대학생의 필독서로 여겨지는 풍토보다는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조금씩 천천히, 나는 테레사와 토마스와 사비나를 알아갔다. 열일곱에 보았던 영화 덕에 그들은 책 속에서 줄리엣 비노쉬와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레나 올린의 얼굴을 하고 웃고 울고 방황하고 사랑했다. 당연히 소설은 영화보다 훨씬 더 깊고 농밀한 세계로 나를 데려갔다. 테레사와 토마스와 사비나는 내게 제 삶과 사유와 영혼을 보여주었다. 물론 조금씩 천천히.

성욕은 여러 여자에게 느끼지만 수면욕은 오직 한 여자에게만 느낀다는 토마스, ‘그럴 수밖에’를 중얼거리며 다시 프라하로 돌아온 토마스, 창문닦이가 된 바람둥이 외과의사 토마스. 검정 중절모를 쓰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비나, ‘진실에 산다’는 것을 보여준 사비나, 농담을, 키치를, 배신을 가르쳐준 아름답고 고독한 사비나.

그리고 테레사,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는 테레사, 쓰러져 일어나고 싶지 않은 현기증에 사로잡힌 나약한 테레사, 그러나 낮은 하늘에 위협적으로 비행기가 날고 군중과 탱크가 뒤섞여 굴러다니는 미친 프라하의 거리를 미친 듯이 카메라 렌즈에 담았던 테레사.

스무 살에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전율하던 나의 스물다섯, 문득 불길한 꿈에서 깨어나 바로 그 문장을 찾아 확인하기 위해 책장을 더듬거렸던 어느 새벽, 그 문장을 되새기며 오랫동안 희뿌옇게 밝아오는 창 밖을 바라보던 서른 살의 나. 낡은 책을 잠시 가슴에 안았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내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토마스와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던 사비나와 애견 카레닌의 머리를 쓰다듬던 테레사. 우리는 서로 별 말이 없었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한편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한편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아니, 나는 그래야만 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것은 대체로 아름답고 슬픈 일이었다. 앞으로 남은 생의 어느 날 나는 또다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꺼내 그 어느 페이지를 펼치게 될 것이다.

지나간 시간 속의 어느 날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문득문득 테레사와 토마스와 사비나를 창조한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다음과 같은 말을 중얼거리곤 하는 것이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현실화되지 않은 내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 때문에 나는 그들 모두를 한결같이 좋아한다. 그 때문에 그들 모두는 내게 똑같이 불안을 준다. 그들은 누구나 나 자신은 물러나 피했던 경계선을 넘었다. 그들이 넘었던 바로 이 경계는 (이 경계를 넘어서는 곳에 나의 자아는 끝난다) 나의 마음을 끈다. 이 경계의 이면에서 비로소 내 소설이 추구하는 큰 비밀이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참회가 아니라, 함정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추구한다.”


이신조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