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소녀백서

'나는 삶이 내게 별반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두 살에 성장을 멈췄다'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에서 일찍이 인생에 환멸을 배운 주인공 진희는 더 이상 성숙할 필요가 없다고 당돌하게 읊조린다. 조숙한 아이의 위악은 사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의 오스카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어른들의 위선에 저항하기 위해 성장을 멈추기로 결심한 오스카는 스스로 사다리에서 떨어져 영원히 세 살배기 몸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저항과 반항의 의미로 양철북을 두드린다.

어른들의 세계에 냉소와 환멸을 표하는 성숙한 아이들은 성장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다. 진희나 오스카뿐만 아니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 역시 이른 나이에 세상을 향해 날카롭고 냉소적인 시선을 던진다.

여기에 냉소와 조숙에 더없이 강력한 포스를 뿜어내는 캐릭터를 한 명 더 추가한다면 단연 그 주인공은 만화 '고스트 월드'의 이니드일 것이다. '인간은 단순해서 빅맥과 나이키만 주면 돼'라고 웬만한 인간은 모두 잘근잘근 씹어대는 그녀의 독설에는 대중과 획일화된 소비문화에 대한 무한한 혐오감이 담겨 있다.

'고스트 월드'는 작가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의 얼터너티브 만화 작가 다니엘 클라우즈의 작품으로 2002년 영화화됐다. 개봉 당시 제목은 이름만 들어도 3류 포르노 영화 같은 '판타스틱 소녀백서'였다. 하지만 반항적인 소녀들의 성적 일탈을 기대하는 건 금물. 스크린상에서 다시 태어난 이니드는 자의식 과잉으로 세상과 잘 타협하지 못하는 비주류 삐딱이 그 자체다.

삐딱한 이니드에게는 그나마 조금 사회화가 진행되고 있는 단짝친구 베키가 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 중인 이 둘에겐 모범적으로 사회에 길들여지는 인간들이 딱 밥맛이다. 고작 빅맥이나 나이키로 대변되는 소비문화에 젖어든 한심한 족속들이나, 되도 않는 걸 현대예술이라고 꾸며대는 허위의식으로 가득찬 먹물들은 어김없이 이들의 조롱 대상이다. 여기에 신문지상에 구인광고나 내는 변태 얼간이들도 이들의 놀잇감이 된다.

그런데 이들의 냉소와 조소 레이더에 또 다른 비주류의 아웃사이더 남자 시모어가 등장하면서 이니드와 베키의 우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장난이나 쳐 볼 요량으로 시모어에게 접근한 이니드가 구닥다리 LP판 수집광인 시모어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품게 된 것이다. 불혹의 나이에 세상의 이문을 좇지 않고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시모어. 그는 돈과 물질이 모든 걸 잠식해 버리고 진실이란 진실은 모두 환영이 되어버리는 유령 사회(고스트 월드)에서 이니드의 유일한 소통처가 되어 준다.

하지만 유령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니드는 진실의 신기루 속에 살아가는 또 하나의 고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커피숍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베키는 어느덧 유령 종족이 되어가고 있고 시모어는 얼간이 취급을 받으며 적당히 타협한다. 하지만 이니드는 갈팡질팡한다. 탐폰이 담긴 커피잔이 무턱대고 오브제 예술로 인정받는 개념 상실의 시대를 과연 살아가야 하는가.

조숙한 독설가 이니드처럼 성장을 거부한 아이들은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다. 하지만 그들의 냉소와 위악 뒤에는 그들에게 환멸만을 보여준 고스트 월드의 어둠이 자리잡고 있다. '판타스틱 소녀백서'라는 얄궂은 제목이 나름대로 심오한 이 영화를 결코 설명해 줄 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스트 월드의 판타지 세계는 절대로 판타스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