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한천팔경 - 우암 송시열 은둔처… 봉우리서 감상하는 보름달 백미

백두대간과 금강을 동시에 껴안고 있는 충북 영동은 감나무 가로수와 당도 높은 포도, 난계 박연을 추모하는 난계유적지, 금강변의 양산팔경 등으로 잘 알려진 고을이다. 그중 황간면에 있는 월류봉의 한천팔경은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명세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런데 최근 월류봉 기슭에 정자가 하나 세워졌는데, 가서 보니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이번 주엔 한천팔경으로 떠나보자.

아픈 역사의 현장, 노근리 쌍굴다리

한천팔경의 으뜸인 월류봉을 감상하려면 경부고속도로 황간 나들목으로 나온 다음 우회전해 황간면 소재지를 지나야 한다. 그러나 나들목에서 좌회전해 영동 방면으로 2km만 달리면 우리 슬픈 역사의 현장인 노근리 쌍굴다리를 만날 수 있으니 잠시 들러보자.

노근리사건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26일 미군들이 미처 피난을 하지 못한 사람들을 쌍굴다리 밑으로 모아놓고 사격을 가해 25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양민학살사건으로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비극 가운데 하나다. 콘크리트 다리엔 아직도 총탄 자국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과 유족들은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했으나 묵살되었고, 이후 군사독재 시절엔 어디에 드러내놓고 말도 못했다. 그러다 지난 1999년 9월 AP통신 등의 보도로 비로소 이 사건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비밀 해제된 군 작전명령 중에서 '그들(피난민들)을 적군으로 대하라'라는 명령의 원문(原文)이 공개되면서 미국 대통령에게서 유감 성명을 받아내기도 했다.

앞으로 2009년까지 노근리사건 현장에서 가까운 노송초등학교 일대에 위령탑과 역사자료관이 들어서는 역사공원을 조성하고, 인근 야산에는 노근리사건 희생자 합동묘역도 만들 예정이라 한다. 하지만, 현재 미국과 유족측은 원만한 의견 합일을 보지 못하고 있어 이 사업도 난항을 겪고 있다.

도담삼봉에 견줄 명품

노근리 쌍굴을 빠져나온 뒤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4번 국도를 타고 3~4km 정도 달리면 황간면 소재지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해 514번 지방도로 바꿔 타고 3km만 더 가면 한천팔경(寒泉八景)이 반긴다.

한천팔경은 백두대간의 민주지산에서 발원한 초강천이 월류봉(月留峰)에서 이어지는 암봉을 휘돌아 흐르면서 빚어낸 자연의 작품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던 한천정사(寒泉精舍)가 있어 한천팔경이란 이름이 유래했는데, 우암은 병자호란 직후 32세 되던 해 이곳에서 은둔하면서 여러 해를 지낼 당시 아침마다 월류봉 중턱의 샘까지 오르내렸다고 한다.

원래는 우암을 배향하는 한천서원이 있었는데,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된 후 후학들이 유림회를 결성해 한천정사를 건립했다.

월류봉을 비롯해 화헌악, 용연동, 산양벽, 청학굴, 법존암, 사군봉, 냉천정 이렇게 여덟 경치 중에서 으뜸은 둥근 달이 휘영청 밝은 보름밤에 감상하는 월류봉이다. 그러나 사실은 한천팔경이란 대부분 월류봉의 여러 모습을 지칭한 것이다. 화헌악(花軒岳)은 봄에 진달래와 철쭉으로 붉게 물든 광경이고, 월류봉 아래의 깊은 소는 용연동(龍淵洞), 월류봉의 깎아지른 절벽은 산양벽(山羊壁)이다.

▲ 한천정사
▲ 노근리 쌍굴

퇴락한 한천정사 앞에서 보면 강 건너로 잘 생긴 암봉들이 펼쳐진 게 보인다. 그리고 월류봉 한 줄기가 강물로 잦아들기 전에 솟은 바위 위엔 단청으로 곱게 멋을 낸 정자 하나가 다소곳이 앉아있다.

이 정자는 지난 9월 20일 무렵에 세운 것인데, 휘돌아 가는 옥빛 물줄기와 수석 같은 암봉, 그리고 여성스런 정자가 빚어낸 풍경은 잘 그려진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이 정자는 저 유명한 단양 도담삼봉의 그것처럼 감상용으로만 지은 것이기 때문에 직접 올라갈 수 없다. 그러나 드라마나 영화, 광고 등의 배경지로도 전혀 손색이 없으니 앞으로 제법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월류봉을 빠져나와 이번엔 49번 국가지원지방도를 타고 상주 방면으로 10여 분 달리면 백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반야사(般若寺)가 나온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맑디맑은 석천이 백화산 아랫자락을 휘감고 가면서 빚어진 연꽃 지형의 중심에 절집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1371호)과 500년 묵은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아주 잘 어울린다.

이 삼층석탑은 원래 반야사 북쪽의 석천계곡 ‘탑벌’에 있던 것을 1950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것이라 한다. 토단 위에 건립되어 있는데, 지대석으로부터 마지막 층까지 대체로 완전한 편이다. 이 석탑은 백제계와 신라계 석탑의 양식을 절충한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배롱나무는 조선 건국 당시 무학대사가 이곳을 지나다 주장자를 꼽아둔 것이 갈라지면서 쌍으로 자라난 것이라 전한다.

교통 경부고속도로 황간 나들목→ 4번 국도(황간 방면)→ 황간면 소재지(좌회전)→ 514번 지방도→ 한천팔경. 황간 나들목에서 10분 소요.
△서울→황간= 강남터미널에서 매일 40분 간격으로 수시(06:00~20:00) 운행하는 구미행 고속버스 이용. 2시간40분 소요. 서울→영동= 동서울터미널에서 매일 2시간 간격(10:00~18:00)으로 운행. 2시간40분 소요, 요금 1만3,800원.
대전→영동=동부터미널에서 매일 12회(07:00~19:40) 운행. 1시간 소요, 요금 4,800원. 영동→황간=매일 20여회(05:30~20:10) 운행. 30분 소요, 요금 1,400원.

숙식 황간면에 비취파크(043-742-6001), 힐탑파크(043-744-9172)의 모텔급 숙박업소가 있다. 또 원촌리에 월유봉집(043-742-8652), 우매리에 숲속민박(043-742-8118), 반야산장민박(043-744-6532) 등의 민박집이 있다. 황간면 소재지에 국밥 등을 파는 식당도 여럿 있다.




글·사진 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