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아탈리 지음 / 이효숙 옮김 / 예담 발행 / 2만원

우리 시대의 ‘르네상스맨’ 자크 아탈리가 쓴 이 책엔 ‘마르크스를 위한 변명’이란 부제가 잘 어울릴 법하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든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던 적이 결코 없었다”고 변론하면서도 저자는 “가장 훌륭했던 꿈이 어떻게 해서 가장 나쁜 야만으로 일탈하기에 이르렀는지”를 밝히는 일을 기꺼이 자임한다. 여기서 ‘꿈’은 마르크스가 생전에 지녔던 사상을, ‘야만’은 길고도 끔찍한 실패로 끝난 공산주의를 지칭함은 물론이다. 꿈과 야만을 철저히 분리하는 일, 이것이 ‘마르크스의 변호사’ 아탈리의 기본 자세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가 방점을 찍은 것은 마르크스의 꿈=사상이다. 예순다섯 생애에 벌어진 다사다난을 꼼꼼하게 되살린 것도 개인적 처지가 사유에 미친 영향까지 따져보려는, 그래서 천재 사상가의 지적 궤적을 보다 정확히 그리려는 이유에서다. 셰익스피어와 발자크를 애독하고, 가난할지언정 딸들의 음악·연극 레슨비엔 돈을 아끼지 않던 그이기에 “사상·예술은 계급투쟁에서 배제된다”는 예외를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원고에 일말의 오류가 있을까 두려워 걸핏하면 출판을 미룰 핑계를 찾던 모습에선 그 유명한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개념이 언뜻 비친다.

흥미로운 건 마르크스의 사생활까지도 감싸주려 애쓰는 저자의 태도다. 물론 집필 의도 자체가 독자가 솔깃할 만한 선정적 일화를 들추는 것과는 거리가 멀긴 하지만, 같은 에피소드를 다루더라도 아탈리의 마르크스는 확실히 점잖다. 국내 마르크스 전기물 중 가장 대중적인 프랜시스 윈(푸른숲, 2000)의 것과 비교해 보자. 두 책 모두 마르크스가 혼외정사로 아들을 두었다는 게 정설임을 인정한다. 윈의 책이 10쪽 가량을 할애해 반대측 논리까지 공박하며 비아냥대는 데 반해, 아탈리는 확실한 증거라곤 엥겔스의 유언밖에 없다는 뉘앙스를 은근히 전한다.

반면 프로이센 첩자의 마르크스 집 염탐기-“담배 연기로 가득한 지저분한 동굴”-를 다루는 두 필자의 입장은 사뭇 다르다. 윈은 첩자가 “충격을 받았다”는 둥 가볍게 전하지만, 마르크스의 변호사는 첩자 슈티버가 얼마나 출세지향적 인물이었나를 틈나는 대로 강조하면서 기록의 신뢰성을 의심한다.

아무튼 700여 쪽의 성실한 논의를 통해 필자는 마르크스를 온갖 불리한 통념으로부터 구해내고자 애쓴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마르크스가 19세기 유럽의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폭력 혁명이 아닌 의회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옹호했다는 점이다.

무정부주의자 바쿠닌과 갈등을 빚은 것도 단순한 주도권 다툼이 아니라 선거를 통한 의회 진출을 사회주의의 경로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아탈리-그 자신이 미테랑 사회당 정부 요인이었다-는 주장한다. 한편 엥겔스조차 마르크스 사상을 변질시켰다고 판단하는 저자는 레닌-스탈린의 소련이야말로 마르크스의 희망과 대척에 선 엉터리 공산주의 사회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마르크스 사후 세계 각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꿈이 스러져가는 과정을 훑어보는 데 마지막 장을 할애한 필자는 “마르크스가 죽었을 때 열린 긴 괄호의 문은 닫혔다”고 선언한다. 그 문학적 수사가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마르크스의 꿈이 죽었다는 것. 더 이상 그의 사상에 의해 추동되는 세계의 변혁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럼에도 아탈리는 왜 그토록 섬세하고 우호적인 태도로 마르크스 사상에 씌워진 ‘마르크스주의’란 멍에를 벗겨낸 것일까.

그는 전망한다. 자본주의의 미다스 손이 더 이상 상품으로 만들 자원이 없게 되는 경계에서 ‘세계적 사회주의’로 통하는 문이 열릴 수 있다고. “시장이 박애주의에 자리를 내주는” 그 신세계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꿈을 떠올려야 한다고. 그곳에서는 자유와 책임, 공동 소유와 무상 이용이 생(生)의 코드가 되리라. 지독한 가난, 부인과 네 자녀를 먼저 보내는 슬픔 속에서도 끝끝내 놓지 않았던 ‘최선의 인류’를 향한 꿈. 그것이 마르크스 사상의 고갱이임을 밝히며 저자는 펜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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