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作,

나름대로 진지한 독서를 하고 있는 독자라면 알랭 드 보통(1969- )이란 이름을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한두 권쯤 그의 책을 읽어보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의 책이라면 빼놓지 않고 찾아 읽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스위스 출신으로 현재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드 보통은 90년대 이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젊은 작가로, 그의 작품들은 현재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1993년 발표된 그의 처녀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원제 Essay in Love)>는 국내 서점가에서도 스테디셀러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소설이다.

드 보통의 작품이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그가 단순한 ‘재미’ 이상의 ‘재미’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예의 ‘재미 이상의 재미’는 그의 글이 독자와 평단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한 남녀의 만남, 사랑, 갈등, 헤어짐의 과정을 그린 연애소설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러한 유형의 이야기는 소설이 생긴 이래 수도 없이 반복된 것이기도 하다. 하나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소재와 주제를 어떻게 하면 참신하고 독창적으로 승화시켜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 - 특별한 작가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드 보통은 고정관념을 깨는 흥미로운 발상, 위트와 유머, 거기에 평범한 일상에도 깊이 있게 적용시킬 수 있는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으로 승부를 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있으면 우리는 연인의 대수롭지 않은 행동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와 비트겐슈타인의 심오한 철학 이론을 이해할 수 있고, 사랑에 빠진 자신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가 파스칼의 잠언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물론 작품은 교양서가 아닌 소설로서의 완성도를 충분히 성취하고 있다. 드 보통식(式)의 깊이와 재미가 생경하지만 매력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더없이 지적이면서도 과시나 교만 없이, 독자를 가르치려드는 무모한 계몽 없이, 그러면서도 따분하거나 딱딱하지 않게, ‘재미 이상의 재미’를 추구하는 - 그것이 바로 드 보통 특유의 작가적 개성이다.

몇 편의 소설을 발표한 뒤, 최근의 드 보통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글쓰기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철학자, 에세이스트, 다큐멘터리 제작자이기도 하다. 어떤 종류의 글쓰기가 되었든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은 얼핏 현실과 유리되어 거창하고 고고하게만 여겨지는 철학과 예술을 우리의 실질적인 삶에 적극 적용시키려는 태도다.

<불안 (원제 Status Anxiety)>은 그러한 작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철학 에세이다.

드 보통은 21세기 첨단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숙명처럼 짊어지고 있는 ‘불안’에 대해 고찰한다.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주로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이다. 물론 여기서의 지위란 부와 명예 같은 상징적인 지위를 포함한다. 수 세기 전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현대인들은 자신의 위치에 대한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불안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의 재앙인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신분과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현대 사회의 전제 조건은 얼핏 정당하고 공평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능력’이 한 개인의 순수한 재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는 시대상황이나 개인의 운(運)과 같은 온갖 복잡하고 불확실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자신이 원하는 지위를 얻는다 해도 그것을 영구히 유지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노심초사한다. 우리는 봉건 시대의 귀족이나 농민이라면 굳이 겪지 않았어도 될 불안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비단 드 보통만이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대인이 겪고 있는 불안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 책들의 대부분은 서점의 ‘처세술’ 코너에 쌓여 있다. 그 책들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전략’이다. 드 보통은 다르다. 그는 우선 불안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삶이라는 전쟁터는 과연 어떠한 곳인가?’, ‘삶은 과연 전쟁이기만 한 것인가?’

<불안>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원인을 하나하나 분석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법으로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를 제시한다. 쇼펜하우어의 지적인 염세주의, 제인 오스틴의 소설, 우스꽝스러운 풍자회화들, 시대의 흐름에 따른 정치적 역사적 가치관의 변화, 죽음에 대한 기독교의 세계관, 진정한 보헤미안의 생활 방식 등등. 드 보통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을 친근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그것에 새롭고 풍부한 해석을 덧붙여 지식을 온전한 ‘지혜’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물론 특유의 위트와 유머도 함께.

“우선 가장 분명한 점은 삶이 비평이 필요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피조물로 늘 가짜 신들을 섬기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남의 행동을 오해하고, 비생산적인 불안과 욕망에 사로잡히고, 허영과 오류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소설, 시, 희곡, 회화, 영화 등 예술 작품은 은근히 또 재미있게, 익살을 부리기도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우리의 조건을 설명해주는 매체 역할을 한다.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준다.”

진지한 성찰과 유연한 상상력으로 우리는 자신이 가진 불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불안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여,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불안을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설가 coolpond@net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