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찾은 '용서·화해의 길'5억 들인 초저예산 로드무비… 배창호표 미학 물씬
로드무비의 주인공들이 지나는 길의 형태와 성격은 인생의 행로에서 부딪히게 되는 다양한 사건들을 은유한다. 배창호 감독의 <길>은 이 같은 길의 이미지를 가장 정통적인 방식의 드라마 위에 포개 놓는 로드무비다. 원초적인 인간성의 본질인 ‘방랑벽’을 주제로 한 이 영화는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이 인생과 드라마를 구성한다.
대장장이 남자의 인생전서
<길>을 통해 배창호 감독은 1960~70년대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삼은 문예영화의 향기를 되살리려 한다.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김성종의 <만다라> 등 문학작품에서 길은 파란만장한 인생의 역정을 뚫고 각성과 깨침을 주는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길>에서 주인공 김태석(배창호)이 거쳐가는 여정도 수많은 문학을 통해 익숙한 길과 인생의 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태석은 시골 장터를 떠돌며 재래식으로 연장을 만들어 파는 대장장이다. 무거운 풀무를 지고 장터에서 장터로 옮아가는 태석에게는 특별한 거처도 가족도 없다. 우연히 올라탄 버스에서 만난 소녀 신영(강기화)과 동행하게 된 태석은 신영이 오래 전 자신을 배신했던 친구 득수(권범택)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득수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귀향한 신영을 통해 태석은 잊고 싶었던 과거와 해후한다. 한때 절친한 친구였으나 지금은 철천지 원수가 된 득수의 죽음 앞에서 태석은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고 화해와 용서의 세계로 나아간다. '길'은 대장장이 태석과 함께 이 영화의 정감을 만들어가는 무생물 주인공이다. 배창호 감독은 우직하고 끈기 있는 장인의 손길로 연장을 만드는 태석이 체화하고 있는 삶의 태도 마냥 성실하게 발품을 팔아 발견한 아름다운 길들을 화면 위에 수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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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시절의 생활문화를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는 배 감독의 말처럼 영화 속에는 대폿집과 여인숙, 허름한 이발소가 정감 있게 화면을 채우고 있다. 향토색 짙은 로케이션과 공간 뿐 아니라 소재와 이야기, 제작, 배급방식 등에서도 <길>은 당대 주류 한국영화의 흐름에서 한참 비껴나 있다. 한국인들에게 고유한 삶의 방식과 정서, 미학을 탐구하려 한 배창호의 의지는 '가난의 미학'이라 불러도 좋을 5억원이라는 초저예산 프로젝트로 꽃피웠다.
덕분에 영상을 기름지게 만드는 첨단 기술들을 하나도 쓰지 못했지만 장인정신으로 빚어낸 화면들은 충분히 음미할만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속도전 등 현대적 가치 비판
<길>은 말보다 풍경이 모든 걸 말하는 영화다. 길 위의 태석은 흡사 고행길에 오른 수도승 같다. 태석이 거쳐가는 길들은 우리들
모두가 한때 지나왔거나 앞으로 가야 할 길들과 닮았다. 혹자는 처음부터 편편하고 넓은 길을 찾아가고, 어떤 이는 일부러 험하고 외진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젊은 시절의 꿈과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긴 남자의 박탈감과 정한, 뿌리까지 타 들어가 푸석푸석해진 속내를 반영한 길 위의 여정은 고통의 행로에서 용서의 여행으로 바뀐다. <흑수선>으로 2000년대 산업화된 한국영화의 중심에 서봤던 배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중견의 성찰로 되돌아갔다.
그는 고집스러운 대장장이의 재래식 방법은 속도와 규모가 미덕이 돼 버린 우리 시대의 가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한다. 크고 빠른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며, 인간의 손길과 정성이 담긴 과거 유산들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재확인시키려 한다. <길>은 대장장이의 일생을 통해 삶의 피로와 고단한 인생, 그리고 그 모두를 극복하는 화해의 메시지를 전한다. 태석이 돌아온 길이 주는 깨달음이 있다면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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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귀환이 예정된 떠남일지라도 길 위의 여정이 가지는 의미가 있다면 이런 새로운 발견의 의미 때문이다. 길 위에 놓여있는 방랑의 흔적을 통해 인생의 진리에 도달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낡고 철지나 보이는 사물 하나에도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늦었지만 의미 있는 깨달음이다. 배 감독은 화려한 흥행사의 과거를 뒤로한 채 불과 25명의 스탭만을 데리고 찍은 독립영화 <길>을 통해 그 같은 깨달음을 몸소 실천해 보인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