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걷는다, 자연과 소통을 위해조지프A. 아마토 지음/ 김승욱 옮김/ 작가정신 발행/ 2만5,000원

180만 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 인간의 선조 호모에렉투스가 기어코 두 발로 아프리카 대지를 딛고 선 이래 인간 역사에서 걷는 일은 그야말로 ‘알파요 오메가’였다.

인간은 쉼없이 더 나은 생활 터전을 찾아 이동했고, 발을 부지런히 놀리며 문명을 건설했다. 미국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저자는 인류의 생득적이며 본질적인 속성인 걷기를 중심으로 역사의 변천을 기술한다. 광범위한 관심사와 방대한 인용 자료가 인상적인 이 책에서 필자는 걷기가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문명사를 통틀어 논할 만한 적실한 바로미터임을 보여준다.

저자는 서유럽과 북아메리카로 논의의 범위를 한정한다. 이들 지역이 특히 근대 이후 문명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런 경계짓기가 그리 무리한 것 같지는 않다. 걷기를 화두로 필자가 다루는 주제는 도시, 문화, 산업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이다.

우선 걷기가 중력에 이끌려 지표면과 부단히 접촉하는 행위인 만큼 필자의 관심사는 우선적으로 길(도로)의 변천사에 맞춰져 있다. 자연 상태의 길이 인간이 걷는 데 마침맞을 리 없는 것은 당연지사. 길을 인간 문명에 포섭하고 개조하는 작업은 인류 역사의 궤적과 고스란히 겹친다. 문명으로서 길의 시원을 로마인이 닦은 스무 개 남짓의 간선도로에서 찾은 필자는 그후 그 도로가 유럽 중세인들의 생활을 좌우할 만큼 영향력이 컸음을 밝힌다.

좀체 나아질 기미를 안보이던 척박한 도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18세기 이후 산업혁명에 기인한다.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인구로 몸집이 불어난 런던·파리 등 대도시는 운수를 원활히 하는 것은 물론, 도시 말단에까지 통제 권력을 미치기 위해서 도로 확장과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걷기는 문화적 영역에 속하는 행위였다. 중세에는 종교적 구도여행을 떠나는 수도사를 비롯해 빈민, 실업자, 노동자, 학자 등 도보로 여행하는 방랑자들이 넘쳐났다. 절대왕정 시대를 맞아 화려한 궁정문화가 꽃피면서 유럽 귀족에게 걷기는 화려한 패션과 유려한 몸가짐을 과시하는 기회로 인식됐다.

18세기 이후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낭만주의는 위대한 자연과 소통하는 행위로 걷기를 신비화한다. 20세기 전반 파시즘을 비롯한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걸음에 군대식 규율을 부여했다. 발놀림 하나하나에 간섭하며 조직한 획일적 걸음걸이는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이데올로기를 국민에게 주입하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걷기는 또한 권력의 부당한 억압에 항거하는, 민중의 무기이기도 했다. 세련된 통제가 가해지기 전 도로와 광장은 서민들의 불만이 동조하고 쉽사리 일탈적 행동으로 응집시키는 장(場)이었다. 일례로 저자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촉발된 프랑스 혁명은 당시 세계 최대 도시였던 파리의 보행자들이 일군 대사건이라고 단언한다.

그들은 파리에서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향하는 일부 선동가들의 걸음에 흔쾌히 동참하고, 한 달에 60회씩 치러진 공개처형 때마다 기꺼이 환호하는 관중 노릇을 하며 혁명을 타오르게 했다. 제국주의 영국의 소금 전매제에 항의하며 바닷가까지 320㎞를 걸은 간디와 수천 명의 시위대와 함께 닷새간 86㎞를 행진하며 인종차별에 항의한 킹 목사도 걷기를 비폭력 무기로 활용한 사례다.

19세기 후반 이래로 걷기는 위기의 시대를 맞은 듯하다. 자동차가 대량 보급되고 도로 포장기술·건축기법 발전이 이에 호응하면서 도시의 길은 보행자 아닌 운전자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근대 이후 ‘걸어야만 하는 자’와 ‘걷고 싶을 때 걷는 자’ 사이의 투쟁으로 점철됐던 도시 문명이 이제 걷는 자를 위한 배려를 완전히 거둘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걷기가 문명의 주변부로 밀려나 여가나 레포츠 차원으로 상품화되는 현실을 지적하며 저자는 “걷기가 다시 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비관한다. 하지만 저자는 고도 문명 사회에서도 걷는 일이 홀로 감당할 몫이 분명히 있음에 방점을 찍는다.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진다 한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일부이며, 그중 발은 자연과 직접 맞닿아 교감하고 행동하는 전위 기관이기 때문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