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오는 겨울을 늦추려고 산은 그리도 늦게 단장을 하더니만…. 화려한 단풍 향연이야 놓쳐버렸지만 그래도 뒤늦게 깊어가는 만추의 운치가 제법이다. 게다가 갑작스레 내린 첫눈으로 인해 가을 산은 상체는 하얀 저고리를 입고 하체는 색동 치마를 입은 참으로 멋진 풍광을 선물해주었다.

숲에는 잎이 지고 가지가 마르고 있다. 봄의 새로운 채움을 위한 비움이 시작됐다. 문득, 아직 약간의 광택과 진한 초록 기운이 잎새에 남아 있는 뻐꾹나리 한 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매년 눈여겨보고 싶었던 뻐꾹나리 고운 꽃 모습을 올해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나보다. 못내 아쉽다. 그러나 올 한 해 놓치고 지나온 식물이 어디 뻐꾹나리 꽃뿐이랴.

뻐꾹나리. 뻐꾸기도 나리도 푸근한 이름인데 두 단어가 붙어 명명된 뻐꾹나리는 귀에 더없이 친근하다. 하지만 눈으로는 그리 흔하게 만나는 식물이 아니다. 오히려 어렵게 만나서 눈여겨 바라보고, 특이한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머릿속에 기억하고 마음속에 담아두는 그런 식물이다.

백합과에 속하는 이 식물은 여러해살이 풀이다. 주로 백양산, 두륜산, 조계산 같은 남부 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근무하는 광릉 숲에도 천연집단이 있다. 짐작컨대 가장 북쪽에 분포하는 북한계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봄이면 잎이 난다. 넓은 타원형의 잎 밑이 줄기를 약간 감싼다. 잎엔 둥굴고 나란한 잎맥이 뚜렷하다. 잎만 보면 둥글레나 큰애기나리와 비슷하다 느껴진다. 한여름이 되면 키는 사람 무릎 높이쯤 자라고 그 끝에 불규칙한 산방상의 꽃송이들이 달린다. 그 꽃이 특별하다. 꽃잎은 6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자주색 반점들이 가득히 귀엽고도 개성있게 박혀 있다. 그 사이에 다시 여섯 개의 수술과 가운데에 불쑥 올라와 갈라진 암술의 모양이 꽃의 핵심이 된다. 그 어떤 꽃도 뻐꾹나리 꽃과는 혼동이 되지 않을 만큼 특이한 모습이다.

쓰임새로 치면 어린 순을 나물로 먹는다지만 백합과인 데다가 흔하지 않은 식물이니 그리 좋은 나물일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관상용으로 더 가치가 있어 보인다. 이미 서양에서는 아시아에서 자라는 이 식물들을 가져가(우리나라의 뻐꾹나리는 아니지만) 원예용으로 육종한 품종들을 심고 있기도 하다.

꽃을 자세히 보면 정말로 멋진 모습이지만, 사실 식물 전체로 보면 꽃의 크기가 작은 편이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식물의 키를 아주 작게 해 작은 화분에 한 뼘쯤 높이로 자라도록 키우기도 한다. 하지만 꽃을 좀 더 크게 만드는 육종을 하면 더 좋지 않을까.

꽃이 좋아 마당 한 켠에 키워보고 싶다면 종자를 뿌리면 아주 잘 난다. 햇빛이 많이 드는 곳보다 약간 그늘진 곳이 더 좋다. 땅이 너무 좋으면 키만 너무 커지는 결점이 있으니 척박한 땅이 되레 유리한 여건일 수도 있다.

사실 뻐꾹나리 집안은 전 세계적으로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20종류쯤 분포하고 우리나라에는 이 식물 한 종류만 자란다. 한때 뻐꾹나리가 우리나라 특산식물인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지만 이웃나라에 있는 종류와 같은 식물인 것으로 판명되어 특산식물의 지위를 잃었다. 그래도 우리 숲 곳곳에 이런 특별한 존재가 자라고 있음이 뿌듯하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