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도 눈물도 없는 건달 母情의 구원을 받다

열혈남아 한국영화의 조폭 애호증은 유별나다. 조폭 코미디와 조폭 누아르, 조폭 멜로까지 '조폭'이라면 이제 신물이 날 때도 됐건만 충무로 조폭 장르의 확장은 끝이 없다.

<열혈남아>는 한국형 조폭 장르의 최신판인 동시에 그 진화를 증거하는 주목할 만한 영화다.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 <열혈남아>에서 받은 영감을 새로운 판본으로 재창조한 신인감독 이정범의 혈기는 단지 '제목'을 빌리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조폭들의 세계로부터 배제 당한 주변적 존재가 자신의 '기질'만으로 복수를 감행하다 감당할 수 없는 딜레마에 부딪힌다는 설정은 '뜨거운 피'라는 제목에서 풍겨 나오는 뉘앙스를 풍부하게 살려내고 있다.

조폭을 등장시킨 여느 영화들과 다른 <열혈남아>의 특징은 모성 멜로드라마와의 결합이다. 계급의 위계, 명령과 복종이라는 무자비한 질서에 의해 지배되는 조폭 세계의 법칙이 '모성'이라는 감성적 센티멘털리즘에 의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기왕의 조폭 영화들과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원수의 어머니를 만나다

<열혈남아>는 대상을 바꾼 <파이란> 같다. <파이란>의 이강재(최민식)가 버러지 같은 양아치의 삶에 한 줄기 서광을 비춘 여인 파이란의 순정에 의해 감화된다면 <열혈남아>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원수의 어머니다. 주인공 재문(설경구)은 조직에서도 열외시킨 부적응 조폭이다.

고아원 출신 형님 민재(류승용)와 엉뚱한 사람을 '작업'해 조직의 눈 밖에 난 재문은 잘못 휘두른 회칼로 인해 민재가 비명횡사하자 복수를 결심한다. 전직 태권도 선수 출신인 신참 조직원 치국(조한선)을 앞세운 재문은 민재를 죽인 원수 대식(윤제문)의 고향 벌교로 내려간다. 대식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치밀하게 살해 계획을 세우는 재문은 대식의 어머니 점심(나문희)이 운영하는 허름한 국밥집을 탐문한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점심은 퉁명스럽게 재문 일행을 대하지만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재문은 자신에게 부재한 '어머니'를 점심에게서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 <열혈남아>는 조폭 누아르로 시작해 모성 멜로드라마로 끝나는 희한한 혼성 장르영화다. 거리낌없이 회칼을 쑤셔대는 조폭들이 설치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정감은 대부분 어머니-자식 관계에서 나온다. 드라마의 상당 부분은 재문과 점심의 보이지 않는 끌림을 형상화하는데 할애된다.

모성이 결핍된 냉혈한 조폭과 타지에서 비명횡사한 아들의 죽음을 부정하는 어머니(점심의 둘째 아들은 남극에서 실종돼 생사가 묘연하다)의 운명적 만남이 멜로드라마적 감정을 끌어내고 있다. 촌구석 국밥집 한 켠에서 어머니를 발견한 냉혈한 조폭의 갈등이 모성 멜로드라마로 전환되는 지점은 고향 집을 찾은 대식을 작업하러 간 날 밤, 재문이 계획을 결행하지 못하고 국밥집을 빠져 나오는 광경을 점심이 목격하면서부터이다.

아슬아슬한 서스펜스가 느껴지도록 연출된 이 장면은 재문의 혼란과 갈등, 점심의 애타는 모정이 기막히게 교차하는 지점이다. 재문의 갈등은 점심에게로 전이된다. 어머니 점심은 목숨이 위태로워진 아들 대식을 위해 경찰서 앞까지 가지만 이미 정이 들어버린 재문의 얼굴이 어른거려 차마 신고를 하지 못한다. <열혈남아>의 감동은 만나서는 안 될 만남에서 비롯된 인간미의 발견에서 나온다.

조폭영화 룰 무너뜨려

이 애절한 모성의 멜로드라마에 추진력을 부여하는 것은 배우들의 힘이다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피를 나누지 않은 ‘모자(母子)’를 연기하는 설경구와 나문희의 솜씨는 명불허전이다. <열혈남아>의 재문은 배우 설경구의 탁월한 인간 묘사의 정점을 보여준다. 선함과 악함, 냉혹함과 천진무구함을 한몸에 지닌 조폭 재문은 설경구가 아니면 표현이 불가능했을 캐릭터였다.

설경구는 언제나 단세포적인 기준만으로 재단할 수 없는 모순적인 특질을 지닌 인물을 연기하는 데 능력을 발휘했다. <박하사탕>의 김영호, <오아시스>의 홍종두가 그러했으며, <역도산>의 역도산 또한 설경구형 인간에서 멀지 않은 캐릭터였다. <주먹이 운다> <너는 내 운명>를 통해 한국적 '어머니'의 페르소나로 자리잡은 나문희 역시 자탄의 표정 하나로 애끓는 모성을 절절하게 표현하는 관록의 연기를 보여준다.

이야기의 전형성에 대한 일각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열혈남아>는 한국형 조폭 장르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은 역작이다. 조폭 장르는 조폭 세계에 대한 신화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조폭들의 세계를 희화화한 트렌디 코미디나 남자들끼리의 우정을 신화화한 누아르 장르로 변주되기는 했지만 장르의 뿌리가 흔들린 적은 없었다. <열혈남아>는 조폭 세계에 대한 미화 혹은 맥락에서 이탈된 턱없는 비장함을 모두 거세시킨다.

<친구>나 <파이란>, <야수> 등의 영화가 멜로나 사회파 드라마로 변주를 시도했지만 장르의 본래적 특징을 말소시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다. <열혈남아>는 이 같은 조폭 장르의 특성을 다르게 변주한다. 남성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의리의 가치가 깨지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양식적 특성에 의해서다. 조폭 장르가 신화화했던 대결과 원한, 복수가 의문시되고 남성적 액션의 세계는 멜로드라마적 감성으로 대체되고 만다.

<열혈남아>는 조폭 누아르보다 멜로드라마로서 즐겨야만 하는 영화다. '모성'의 힘은 신화화된 남성들의 장르인 조폭 누아르를 감성적인 멜로드라마의 차원으로 탈바꿈시킨다. 조금 과장한다면 이건 조폭 장르의 구원과 같은 '사건'이다. 일찍이 이 같은 질적 전화를 시도하려는 야심 찬 시도는 없었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