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문학 두 거장의 우정과 반목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파리 체류기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축제>-국내에선 <파리에서 보낸 7년>(아테네 출판사, 2004)이란 제목으로 번역됐다-에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첫 만남을 기록한 부분이 있다. 1925년 4월 말 한 술집에 유명한 야구선수 덩크 채플린을 대동하고 찾아온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의 작품을 당사자가 거북하리만치 칭찬한다. 그러다 느닷없이 “결혼 전 부인과 잠자리를 했느냐”고 집요하게 묻는다. 모르겠다며 대거리를 피하는 헤밍웨이와 한참 실랑이하던 그는 술잔을 든 채 마비 증세를 보인다. 헤밍웨이는 당황하고 덩크는 피츠제럴드를 택시에 태워 집에 보낸다.

동시대를 살며 미국 문학에 굵직한 획을 그은 두 거장의 첫 대면은 의미심장하다. 15년 뒤 피츠제럴드가 돌연 세상을 뜨기까지 둘의 우정과 반목, 이후 권총으로 자살하기까지 21년을 더 산 헤밍웨이가 죽은 친구에 대해 보인 태도···. 그 드라마틱한 관계의 원형이 이 엉뚱한 술자리에 고스란히 고여 있었다. 떠받들기-거부하기, 질문하기-회피하기, 연극하기-외면하기. 양 작가의 생애 및 작품 연구에 일가를 이룬 필자는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엮어 갔던 애증의 관계를 치밀하게 서술한다.

연대기와 주제별 서술을 적절히 혼합하는 구성을 취하면서 필자는 우선 두 사람의 가정환경을 비교 분석한다. 미국 중서부 중산층 가정에서 3년 차이를 두고 태어난 이들에겐 유약한 아버지와 드센 어머니라는 공통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가 모친의 과시욕과 과잉보호 속에서 자란 데 반해 헤밍웨이는 어머니와 철저히 불화했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아를 지탱하는 나르시시스트(피츠제럴드)와 자만심과 구별 안 되는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쾌남(헤밍웨이)의 성격은 이렇듯 상이한 성장 과정에서 빚어졌다. 공히 열아홉 살에 겪은 실연의 상처에 대응하는 방식 차이도 이로써 설명된다. 헤밍웨이는 ‘그녀’를 한 단편소설의 모델로 삼고 가차없이 깎아내려 분노를 중화시킨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쓰는 작품마다 ‘그녀’를 불러내 홀로 애틋해하며 상처를 덧낸다.

하여, 파리의 술집에서 만나 1929년 사실상 관계가 파탄날 때까지 우정의 예금통장에서 초과 인출하는 쪽은 대체로 피츠제럴드였다. 걸작 <위대한 개츠비>로 최전성기를 누리던 그는 처음 만날 당시 신출내기에 불과했던 헤밍웨이의 후견인을 자청하고 나섰다. 미국 굴지의 출판사 스크리브너스 편집장 맥스웰 퍼킨스에게 친구의 작품을 적극 소개했고, 첫 단편집이 나왔을 땐 한껏 추어올리는 서평 기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처럼 동료를 위했지만 정작 자신의 일은 등한시한 탓에 피츠제럴드의 명성은 승승장구하는 헤밍웨이와 엇갈려 곤두박질친다. 점점 늘어나는 술을 이기지 못하고 저지르는 온갖 기행은 스스로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다.

반면 헤밍웨이는 차갑다. 스콧의 영락을 방관한 것은 물론, 사후에 일어난 우호적 재평가 작업을 시기해 딴죽걸기 일쑤였다. 생의 모든 국면을 경쟁으로 파악하고 전의를 불태우는, 강박적 미국 문화의 화신이었던 그에게 이런 냉정함은 차라리 필연이었다. 보통의 독자라면 피츠제럴드의 여리다 못해 피학적인 심성에 자연스레 마음이 기울 텐데, 저자는 그 기울기를 줄이려 굳이 애쓰지 않는다.

작가들의 우정이란 시기, 질투, 경쟁심에 불타기 쉬워 ‘달걀껍질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며, 헤밍웨이가 성공에 반했던 것만큼이나 피츠제럴드는 실패에 매혹되고야 마는 숙명을 타고났을 뿐이다. 단 누군가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일에 서툴렀던 헤밍웨이가 유일하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이가 피츠제럴드임을 저자는 조심스레 상기시킨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는 개성있는 캐릭터뿐 아니라 작품으로도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때문에 필자가 두 거장의 생애와 심리를 다루는 한편으로 그것이 작품 속에 투영되는 양상까지 짚어보려 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문학적 컨텍스트 분석은 연대기에 밀려 부차적으로 취급됐고, 분석 수준 역시 개인 이력과 성격에 머물 뿐 사회·역사적 차원에는 전혀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 책이 두 편의 흥미로운 전기를 단순하게 교차 편집한 수준에 머문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