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도 실제로 '게이'… 멜로드라마 그릇 속에 이색 사랑을 담아

영화 바깥 이야기들이 영화보다 화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주연 배우가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켰다든지, 영화의 소재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만한 이슈를 제기했다든지,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든지 하는 따위가 입방아에 오르내릴 때 화젯거리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런 류의 관심이란 본론을 벗어난 것인지라 영화 자체가 매력적이지 않다면 이내 수그러들거나 기억에서 지워지고 만다.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는 영화 바깥의 이야기로 화제를 모았지만 쉽게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짐작컨대, <후회하지 않아>는 올해 신인감독의 데뷔작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야심작 중 하나다. 이 영화가 개봉 전 화제를 모은 이유는 연출자인 이송희일 감독이 '게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기자나 평론가들은 이제 그만 내 아랫도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관심을 끊어줬으면 좋겠다"는 일침을 날렸을 만큼 그는 게이라는 이유로 주목받기를 사양한다.

신인배우 이영훈의 연기력도 주목

<후회하지 않아>는 1970년대 한국영화계를 풍미한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를 현대적으로 변형한다. 영화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시골 처녀가 상경해 여공, 버스 안내양 등 하층민 생활을 전전하다 호스티스로 전락한다는 70년대 호스티스물의 기둥 줄거리를 그대로 가져온다. 시골에서 자란 고아 출신 수민(이영훈)은 서울로 와 공장일, 대리운전, 컴퓨터 학원 수강 등 쉴 새 없이 일하고 공부하는 건실한 청년이다.

어느 날 대리운전 손님으로 만난 부잣집 아들 재민(이한)이 그에게 호감을 보이지만 수민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재민이 자신이 일하는 공장 사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수민은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게이 호스트바에 취직한다. 약혼녀(김정화)까지 있는 재민은 수민을 잊지 못하고 그가 일하는 호스트바에 드나든다. 끈질긴 구애 끝에 두 사람은 커플이 되지만 완고한 재민의 부모는 약혼녀와의 강제 결혼을 추진하고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이 게이 커플에게 시련이 닥친다. 하나의 목표에

접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후회하지 않아>는 에둘러 가는 듯하지만 주저하지 않고 할 말을 한다. <영자의 전성시대>, <별들의 고향> 등의 70년대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는 개발독재 시대 정치적, 사회적, 성적 억압에 시달렸던 시골 출신 호스티스들의 눈물겨운 상경기를 멜로드라마의 센티멘털리즘 속에 녹여냈다. 2006년 버전 '호스티스물'인 <후회하지 않아>는 경제 발전의 뒷골목에서 신음하는 호스티스들의 삶을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게이의 이야기로 탈바꿈시킨다.

게이 커플의 로맨스라는 낯선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즐길 이유들은 충분하다. 태생과 계급, 성격이 판이한 커플의 시련을 극복한 로맨스라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줄거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통속성이 발현되는 지점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그것을 게이 코드로 뒤바꾼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이송희일 감독의 <굿 로맨스>라는 단편 출연 경력이 전부인 신인배우 이영훈이다. 이 영화를 통해 발견된 이영훈은 순수함과 슬픔, 강직함을 두루 갖춘 게이 청년 수민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거침없이 돌파하는 통속의 완력

<후회하지 않아>는 창의적으로 장르를 활용한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독립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송희일 감독은 충무로 장편 상업영화 연출은 처음이지만 성공적으로 대중의 기호에 다가간다. 초저예산 디지털 영화라는 제작 조건의 한계 속에서도 하나의 주제를 일관되게 관철시키는 연출자의 뚝심은 칭찬할 만하다.

결혼한

게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언제나 일요일같이>, <슈가힐>, <굿 로맨스> 등의 단편을 통해 재능을 입증한 그는 다양한 성적, 정치적 이슈를 통속적인 장르영화 속에 녹여내는 솜씨가 좋은 연출자다. 무엇보다 <후회하지 않아>는 멜로드라마라는 통속 장르의 잠재성을 최대한 활용한다.

드라마 전개는 그 어떤 멜로드라마보다 통속적이고 전형적이지만 전형성은 결코 영화의 약점이 되지 않는다. 통속성의 힘은 속된 세상에서 벌어지는 속된 사건들을 끝까지 밀어부쳤을 때 발생하는 ‘효과’에서 찾을 수 있다. 대중에게 익숙한 상업적인 이야기에 감독의 메시지를 결합했을 때의 파괴력이 거기서 나온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말초적인 관심이 아니더라도 <후회하지 않아>는 후회하지 않을 감동을 선사할 작품이다. 이송희일 감독이 구사하는 전략은 뚜렷하다. 이성애를 다룬 통속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웃고 울었던 순간들을 게이 코드로 바꾸었을 때 관객

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는 얌전한 표현으로 이들의 사랑을 미화하거나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사랑의 방식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길을 택한다.

정치적 의제나 섹슈얼리티에 대한 설교를 늘어놓는 대신 지극한 통속의 매력으로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수긍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화법을 선택한 것이다. 멜로드라마라는 속화된 장르가 정치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은 바로 이 지점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통속의 힘’을 지닌 영화를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후회하지 않아>는 로맨스의 주체가 이성애 커플에서 동성애 커플로 바뀌었을 뿐 장르가 가진 정서와 효과는 전혀 다르지 않은, 별스러울 것 없는 러브스토리다. <후회하지 않아>는 이 간단하고도 명백한 진리를 장르의 전희를 통해 증명한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