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도피 소녀의 백일몽 판타지의 진수가 되다제작비 50억원 초저예산으로 할리우드 뺨친 수작
개성과 색깔은 다르지만, 그들의 작품을 잘 살펴보면 인간의 기억, 망상, 환상 등 남미 특유의 신비주의 색채를 조금씩 가지고 있다. 또 한명의 멕시코 출신 기린아 기예르모 델 토로의 신작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이하 <판의 미로>)는 그의 탁월한 재능에 대해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준작이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가 제작사로 참여하고 있지만, 유럽영화의 감수성과 남미 특유의 자기 반영적인 환상성이 두드러지는 비할리우드적인 판타지 영화다.
지하 세계 공주의 모험
스페인 내전 직후 프랑코 독재 정권이 승기를 잡고 정부에 반대하는 레지스탕스를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무렵, 깊은 산속에 은거한 레지스탕스 무리들을 색출하기 위해 정부에서 파견된 비달 대위는 재혼한 만삭의 아내와 그녀의 전 남편의 딸인 오필리아를 자신이 거처하는 산속의 시골 마을로 불러들인다. 레지스탕스 색출을 위해 어떤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는 냉혹한 비달 대위의 모습에 오필리아는 진저리 치지만, 상황은 점점 더 험악해져만 간다.
한편 요정 이야기에 깊이 빠져 있는 오필리아는 어느 날 밤 요정의 인도로 숲 근처의 미로에서 숲의 정령 판을 만난다. 판은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 지하 세계의 공주이며, 다시 공주로 영생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달 대위의 잔인한 행위는 날로 더해가고, 오랜 여행으로 무리한 어머니가 생사를 헤맬 무렵 오필리아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신비한 모험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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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와 세고비아 등지에서 단 11일 만에 촬영을 마친 이 영화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캐리비안의 해적>류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한화 약 50억 원이라는 극도의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완성도를 자랑한다. 특수효과 기술자로 할리우드에 입문한 기예르모 델 토로는 <블레이드 2>나 <헬보이>와 같은 특수효과로 중무장한 블록버스터 영화들로 할리우드를 감복시켰다. 그러나 이 두 영화는 단순히 밝고 호쾌한 영웅 액션 영화가 아닌, 어둠 속에서 탄생한 삐딱한 영웅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감독의 비전이 묻어난다.
잔혹한 현실의 데칼코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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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에서 비달 대위와 그 무리들이 폭력적으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억압할 때, 소녀는 벌레들로 가득 찬 동굴의 거대한 개구리를 퇴치하고 식인귀의 손에서 간신히 달아난다. 요컨대 그녀의 환상은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비달 대위와 레지스탕스, 그리고 마을 주민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에 가깝다. 현실이 보기 싫어 환상 속으로 도피한 소녀라는 비극을 전제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현실과 환상을 왔다갔다하며 파시즘의 잔인무도한 폭압이 사회와 개인에게 미치는 비극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낸다.
<판의 미로>는 <해리 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류의 완전한 자기 세계를 갖춘 판타지라기보다는 한 소녀의 백일몽을 통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아프게 목도하는 남미 문학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맞닿아 있다. 마르케스나 보르헤스의 소설들이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려 독재정권과 내전, 빈곤과 범죄로 얼룩진 남미 여러 국가의 상황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판의 미로>는 스페인 내전의 아픈 역사를 망상에 빠진 한 소녀의 무력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 속 소녀의 모험은 실제처럼 보여지지만, 한편으로 그녀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이중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죽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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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는 어린이용 판타지라기보다는 어른들을 위한 슬프고 잔혹한 동화다. 이 영화는 현실에 대한 도피, 혹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반영이라는 판타지의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판타지를 보여주면서도 결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영화는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을 꿈꾸는 한 소녀의 죽음을 통해 야만적인 과거사에 대한 애도의 시선을 보낸다. 비달 대위의 폭압 아래 무기력하기만 했던 오필리아의 삶과 죽음은 그대로 남미 민중의 지난한 삶과 연결된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단순히 즐기는 판타지 영화가 아닌, 아픈 역사와 현실에 대한 명징한 해석을 내리는 문제적 영화를 만든 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