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대종손 원제대(元濟大) 씨 가난해도 봉제사 접빈객 지켜 '조상의 진실' 알리는데 온힘집성촌 평택 돌아와 종택 지켜… 불천위 제사땐 시장이 초헌관

원릉군(原陵君) 원균(元均) 장군. 우리 역사에서 원균만큼 후대에까지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 경우도 흔치 않다. 그는 원주 원씨이다. 원씨는 성과 본이 하나뿐인 주요 성씨 중의 하나이다. 이를 ‘동조동원(同祖同源)’이라 하는데 응집력도 강하다. 대표적 인물로는 운곡 원천석과 관란 원호, 원균 장군, 충익공 원두표를 손꼽는다. 원씨는 운곡계(耘谷系)와 원성백계(原城伯系), 시중계(侍中系)로 대별할 수 있다.

원천석은 운곡계, 원균은 원성백계, 원두표는 시중계다.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60여 명에 정승 2명을 배출했다. 정승은 인조반정 공신이며 좌의정을 지낸 원두표와 그의 현손으로 우의정을 지낸 원인손인데, 모두 시중계다. 그런데 원씨 문중은 원균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의 갈등과 수전에서 패해 전사하는 과정에 ‘무능하고 간교한 졸장’ 쯤으로 낙인찍혀 명예가 현저하게 실추되었다.

선조 임금은 원균을 믿고 지원

원균을 부정적으로 단정한 예는 택당 이식이 쓴 이순신 장군 시장(諡狀)과 정조가 찬한 이순신 장군 신도비명, 오성 이항복이 쓴 전라좌수영대첩비, 우암 송시열이 쓴 명량묘비, 잠곡 김육이 쓴 신도비명,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 기록 등이다. 그 외에도 후대에 쓰인 많은 글들이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원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했다. 필자는 이러한 자료와 달리 원균의 공적을 드러내고 그 억울함을 토로해 시정하려는 시각에서 쓰인 글을 읽어보았다. 현석 박세채와 우암 송시열의 문인인 후재(厚齋) 김간(金幹, 1646-1732)이 쓴 행장이 그러하다. 일견에도 ‘중과부적(衆寡不敵)’이다.

하지만 당시 국왕인 선조와 아계 이산해, 오음 윤두수 등 중신들은 흔들림 없이 원균을 지원했다. 최고 지휘부의 판단 착오와 원균 자신의 선택으로 결국 패했지만 왕과 지휘부의 믿음은 굳건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후 6년 뒤 많은 논란과 오랜 검토 끝에 원균을 선무1등공신에 녹선하기에 이른다.

묘소 전경
사후의 그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평가한 이들의 면면은 혁혁한 반면 원균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것은 원균의 경우 문집이 남아 있지 않다. 이는 후대에 기념사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원균의 억울함을 역설하는 이들조차도 원균은 전공을 세우고도 보고서를 잘 쓸 줄 몰라 명문장의 이순신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기는 국왕인 선조 역시 무장들이 글을 잘 몰라 도무지 병법서를 읽지 못한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균 자신이 무과에 급제했으며, 조부가 무과를 통해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부친 역시 무과를 통해 수군통제사를 지낸 집안 출신일 뿐만 아니라 초년에 서울 건천동에서 서애 류성룡 등과 함께 글을 읽었던 이력 등을 고려할 때 이는 억측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조선 시대에는 군지휘부에 문필을 담당하는 참모들이 있었다.

필자는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진신서(盡信書)면 불여무서(不如無書)’라는 말을 누차 떠올렸다. “책에 적힌 내용 전부를 믿으면 차라리 책이 없는 편이 낫다”는 말이다. 이는 자신의 관점을 정립해 올바른 것을 택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속칭 ‘내리’에 있는 원균 장군 종손가를 찾은 날은 공교롭게도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이 이회창 씨를 두고 “충무공이 아니라 원균에 가깝다”라고 말해 논란을 빚은 다음날이었다. 원균의 11대 종손 원제대(元濟大, 1941년생) 씨와 문중 어른의 안내를 받아 묘소와 영당을 둘러보고 이웃한 종택에 들어갔다. 입향(入鄕)한 지 500년이 넘는 원주 원씨의 터전에 새로 지은 양옥이었다. 자연히 최 의원 말이 화제로 올랐다. “아직 그 진위를 알아보아야겠지만 잊을만 하면 또 원 장군 이야기를 마음대로 해요. 그래선 안 됩니다.

11대 종손 원제대 씨
우리 선조께서 임진왜란 때 순국하신 뒤 선무1등공신이 되셨어요. 여기 공신교서에 엄연히 그 공적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종손은 옆방에서 컬러로 축소 인쇄된 공신교서와 그것을 번역한 자료를 가지고 나왔다. 실물보다 더 고색창연하게 인쇄된 공신교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단부가 군데군데 불에 탄 흔적이 보이는 공신녹권은 가로 37cm, 세로 272cm로 견 바탕에 해서로 정갈하게 쓰여졌다. 현재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어 경기도박물관에 위탁되어 있다.

선무공신은 모두 18명이 3등급으로 차등 기록되어 있는데, 1등 공신에 이순신과 권율, 원균이 나란히 올라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6년여 만에 녹선이 완료되었으니, 이는 그만큼 임진왜란의 성격 규정과 평가가 임금을 포함한 중신들 사이에 엇갈렸음을 의미한다.

농촌주택임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넓은 거실이 의아했다. “아, 이거요? 제사 등 모임이 있을 때 사람들이 많이 올 것을 생각해서 그렇게 지었어요. 손님이 많이 와요. 음력 7월 15일 불천위 제사 때는 묘소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뒤부터 평택시장이 초헌관을 하는데, 낮에 제사를 올립니다.” 같은 평택의 신숙주 선생 종가에서와 같은 방식이다. 추모제 형식으로 불천위 제사가 변형된 것이다.

종통 계승 우여곡절 많아

영정
종손은 이 지역의 송탄초등학교를 나온 뒤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채 직장생활과 자영업을 하면서 객지를 떠돌았다. 종손의 선친 역시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한 채 고향에서 얼마 안 되는 농토를 일구어 봉제사 접빈객의 소임만을 어렵게 꾸렸다. 종가 살림이 그렇게 어려운가 싶어 경작하고 있는 토지 규모를 물었다. “문중 산이 약간 있고, 제 개인 논이 7마지기, 밭이 한 600여 평 되요.” 일등공신의 종가의 세전지물이 어떻게 이런 정도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두 가지 점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았다. 첫째, 고단한 종통(宗統) 계승 때문이다.

종손이 11대라는 것은 현저하게 다른 종가(원균보다 두 살 적은 류성룡 선생 종가는 14대)와 큰 차를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원균과 아들이 함께 전사했고, 당시 남은 핏덩이 손자로 대를 이었으며, 현 종손의 고조와, 조부, 부친 대에 양자가 있었다는 사실로 사정을 언뜻 짐작할 수 있다.

원균의 손자인 순격(舜格)이 우암 송시열을 찾아가 그가 쓴 증조부 관련 내용이 잘못 기록된 것이 있다며 시정을 요구했는데, 그의 맏아들이 아랫대에 이르러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둘째 집으로 종통이 계승되었다. 둘째, 사후에도 지속된 엇갈린 평가로 공신 녹선과 더불어 당연히 시행되었어야 할 국가적 보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실제로 96세에 졸한 원균의 부인이 국가에 생활의 어려움을 상신한 바 있다.

종손 부부는 현재 인천 부평에서 방앗간을 경영하고 있다. 10여 년 전 부친이 세상을 뜬 뒤 근자에는 종손만 고향으로 돌아와 종가를 지키고 있다.

동행한 문중 어른이 마을의 유래를 설명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공기 좋고 산 좋고 물 좋은 땅입니다. 99골짜기가 있다는 곳이에요. 원래 집터는 지금 이 집 바로 아래인 ‘울음 밭’이 있는 곳입니다. 선조 임금이 하사했던 말이 장군을 잘 따랐는데, 갑작스럽게 전사하시자 말이 입에다 장군의 유품을 물고 천리 길을 달려 집 앞까지 와 크게 울고는 이내 쓰러져 죽었다는 고사가 있는 곳이에요.” 마치 어제 일을 목도한 것처럼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그려냈다. 이는 묘소 하단의 의마총(義馬塚) 비석에 적힌 내용과 옛터에 세운 ‘울음 밭’ 표지석 음기에서 확인했던 내용이다.

집안에 남은 자료가 있는지 물었다. “선친께서 교서(敎書)를 가지고 계셨어요. 그것을 경기도 박물관에 위탁을 했죠. 어릴 때 고리짝에 누런 책이 많았는데, 선친 말씀이 한국전쟁 직전에 어느 대학 교수가 연구한다고 가져갔는데 돌려주지 않았어요. 누군지도 모르고 세월이 흘러 없어지고 말았어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정식(正植, 1982년생) 씨는 미혼으로 대한항공에 다닌다.


원균 1540년(중종35)-1597년(선조30)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평중(平仲), 군호는 원릉(原陵)
임진왜란 선무1등공신… 功過논란 아직도 여전

역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원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택당 이식(1584-1647)이 지은 시장(諡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덕수 이씨로 좌의정 이행의 현손이며 청음 김상헌과 함께 척화론(斥和論)을 펴다 심양으로 잡혀간 절신(節臣)이다. 그는 대제학을 지냈으며 한학사대가(漢學四大家)로 존경을 받았다.

최고의 권위를 지닌 그가 쓴 기록은 이순신의 시호를 청하는 글이다. “이에 앞서 원균이 배 한 척을 타고 공에게 와서 하소연하자 공이 연명으로 승첩을 아뢰곤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공의 공적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을 승진시켜 통제사로 삼았던 것인데, 원균은 공의 아래에 있게 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이때부터 공에게 두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그런 까닭에 공이 항상 부드럽게 포용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균은 사납게 굴고 제멋대로 화풀이를 하면서 공의 절제(節制)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대사를 그르칠까 염려한 나머지 자신의 허물을 들어 인피(引避)하며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묵과할 수 없다고 여겨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키기에 이르렀다. 원균은 쌓인 감정을 풀지 않은 채 조정의 고관들과 결탁하고는 온갖 방법으로 공을 무함하기 시작했다.”

성웅(聖雄)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는 이순신의 위대함을 인정하지만 선무1등공신인 원균에 대한 거침없는 표현에 혼란스럽고 난감하다. 문중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그 원통함에, 택당은 손볼 대상 1순위에 드는 인물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에 민정중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흥미롭다. 1659년에 충무공의 비를 노량의 사당에 세울 때 자신은 택당의 시장을 참고했다고 밝힌 뒤 1689년 5월 통제사 원균의 증손이 찾아와 녹훈교서와 국왕 사제문(賜祭文)을 자료로 제시한 사실을 썼다. 이 때 우암은 택당의 사가(史家)로서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교서와 제문의 기록은 국왕의 말씀이니 그 자손들이 원통하다고 이를 만하다고 위로해 마지않았다. 우암의 제자인 후재 김간이 원균의 행장을 쓴 것도 이러한 정황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원균은 어려서 날래고 힘이 세었다. 28세 때에 식년무과에 을과로 급제해 선전관과 조산보만호가 되어 오랑캐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래서 단계를 뛰어넘어 부령부사로 발탁되었다. 이어 종성부사로 옮겼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전라좌수사로 발탁된 이순신과의 숙명적인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중임을 번갈아 맡으면서 애증도 깊어만 갔다. 단순한 비교를 해보면, 이순신이 32세에 무과에 급제했기에 나이 차 5세를 더하면 원균의 무과 급제는 9년 위가 된다.

세상사가 그러하듯 이 두 사람의 불화 역시 상호 간의 오해에서 발단된 감이 없지 않다. 문제는 연합작전으로 거둔 성과를 ‘장계(狀啓)’로 조정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는데, 원균 측에서는 같이 올리자는 약속을 이순신 측이 어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갈등 관계는 조정 중신들의 개입으로 더욱 번져 전란 초(1594) 원균 측에서 적들로부터 노획한 조총 70자루를 조정에 바치는 역할을 담당했던 아들 원사웅(元士雄)이 ‘첩의 자식(妾子)’이니 하는 등의 인격적인 모독으로까지 이어졌다. 후배로부터 당한 인간적인 배신감과 분노가 컸을 것이다.

실록을 보면 중신들 역시 한결같은 태도를 갖지 못한 채 두 장군 사이를 오간 흔적이 보여 혼란스러움을 더한다. 원균에 대해 당초 약포 정탁과 같은 이도 “원균은 사졸이 따르니 가장 쓸만한 장수다(1594)”라 했고 조정에서는 “오늘날 장수로서는 원균이 으뜸이다(當今將帥 元均爲最)”라고 했으며, 한음 이덕형은 “일에 임해 강직했다”라고 난후에 평했을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의 경우 특히 기록 내용의 사관(史觀)이 극명하게 엇갈린 경우가 있는데, 이는 수정실록까지 남아 있어 그러하다.

더구나 왜적 첩자들의 집요한 이간책으로 조선의 전쟁 지휘부는 뿌리째 흔들렸다. 전후 7년간 이어진 전쟁은 역사에는 승리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최고 공신이던 서애 류성룡마저 동문 선배로부터 오해를 받았고 명예롭지 못한 퇴장을 했을 정도로 참담했다. 국토는 유린되었고 민심은 이반되었으며 지휘부는 분열을 거듭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두 선무1등공신의 엇갈린 평가를 읽으면서 양시론(兩是論)이 아니더라도 안타까운 마음에서 역사적 가정을 해보고 싶다. 임진왜란이 육군의 전쟁이라면 정유재란은 해군이 주축이 된 전쟁이었다. 이순신과 달리 원균은 육군 체질이었다. 그래서 원균과 동방(同榜)인 신립 장군에게 맡긴 역할을 그에게 지웠더라면 수군의 책임을 맡은 이순신 장군과의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타고난 용맹과 북변에서 오랑캐를 다루며 쌓은 경험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나라와 백성에게 보다 기여하지 않았을까.

삼도수군통제사의 중책을 맡은 장군은 지휘부의 무모한 전쟁 독려로 부산 앞바다로 내몰려 목숨을 건 싸움 끝에 세가 불리하여 58세(1597년, 선조30)로 전라수사 이억기(선무2등공신),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왜적선의 집중 공격을 받아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랐으나 매복한 적들에게 수급(首級)마저 보존하지 못했다. 당시 국왕의 평은 의미심장하다.

“원균이 패하여 죽은 이후에 비방하는 말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니 나는 원통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습속은 누가 한 가지 일을 잘하면 그저 현명하다고 하고, 한 가지 일을 실패하면 그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 패전이 어찌 그가 한 일이겠는가? 그 당시의 서장(書狀)을 보면 안골포의 적진을 먼저 몰아낸 후 들어가 토벌하려고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싸움을 독려하고, 원수(권율 장군)는 곤장을 때렸으니 이는 원균이 스스로 패한 것이 아니고 조정에서 그로 하여금 패하게 한 것이다.”

이는 1601년 영의정인 한음 이덕형이 체찰사로 남쪽으로 내려갈 때 선조가 한 말이다. 이때 한음이 “당초 이순신과 서로 바꾼 것이 잘못이었습니다”라 하자, 선조는 다시 “조정에서 급하게 싸우도록 하였으니 비록 장수를 바꾸지 않았다 해도 패했을 것이다”라고 해 원균에 대해 신뢰를 보냈다.

공신도감을 설치해 공신을 선발하고 그 등급을 정할 때 당초 원균을 2등에 두었다. 이를 안 선조는 “이제 논공을 함에 그를 2등에 두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라고 해 1등으로 바꾸어 교지를 내렸다. 이러한 사료를 통해 우리는 국왕 선조가 원균의 최고 지지자였음을 알 수 있다. 공신도감에서 이러한 논의를 할 때 국왕의 전교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신중하라는 의미로 속담을 인용했다. “충분히 헤아려 반드시 공평하고 올바르게 하여 사람들의 비난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 속담에 ‘친구의 덕으로 공신이 되었다(諺曰 以友之德 而爲功臣)’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농담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런 일이 틀림 없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일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성패의 자취는 다를지언정 나라를 위해 죽은 절의는 다를 바 없다’. 이것이 원균 관련 사료를 읽으면서 내린 필자 나름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타인을 공격할 때 순국 역사인물을 끌어들여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이는 고금의 인물 모두에 대한 결례이기 때문이다.

다음호엔 진성 이씨(眞城李氏) 퇴계(退溪) 이황(李滉)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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