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지체 소녀의 홀로서기… 가슴 뭉클한 '여성판 말아톤'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스무 살 소녀의 성장통을 쫓아가는 가족 멜로드라마 <허브>는 여러모로 여성판 <말아톤>을 떠올리게 한다.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은 아이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장애인 주인공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것, 그녀를 걱정하고 돌보는 억척스러운 어머니와의 관계가 갈등의 중심에 있다는 것, 주연 배우의 장애인 연기에 주목하게 하는 점 등이 그렇다. 차이가 있다면 <말아톤>이 주목했던 역경에 찬 가족사에 <허브>는 상큼한 로맨스를 첨가해 멜로드라마적인 재미를 양념으로 첨가한 정도다. 자기만의 세계를 지닌 장애인들의 삶과 그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 그로 인한 갈등과 해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허브>는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소수자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관점이나 극적 갈등의 중심에 가족이 있다는 것 역시 자주 보았던 가족 멜로드라마의 관습적 화법이다. 하지만 그저 그런 이야기의 반복처럼 보이는 영화에도 다소간의 정신적 울림은 있다.

상큼 로맨스로 포장한 가족영화

‘가족’은 최근 한국영화가 맹렬하게 천착하고 있는 테마다. 가족영화라는 전통적 장르를 너머‘가족’은 이 시대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규명하려고 하는 화두임에 분명하다. 장애인 소녀의 홀로서기를 다룬 <허브> 역시‘가족’의 테마를 중심에 놓고 있다.

이 영화의 탄생에는 2년 전 <말아톤>이 거둔 공전의 성공이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허브>는 직접적으로 <말아톤>이 야기한 감동의 코드들을 가져온다. 나이는 스물이지만 정신은 일곱 살에 머물고 있는 천진한 소녀 차상은(강혜정)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친구라고는 맹랑한 말을 일삼는 일곱살 꼬맹이들이 전부인 상은은 우연히 청년 경찰 이종범(정경호)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종범 역시 상은이 지체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국제변호사로 그녀를 대하고 호감을 표한다. 우연한 기회에 상은의 배경을 알게 된 종범은 쌀쌀맞게 이별을 통보하지만 자신에게 보내는 그녀의 마음을 알고 진심으로 상은을 대하기 시작한다. 한편, 상은의 억척스러운 어머니 현숙(배종옥)은 벼락같은 암 선고를 받고 딸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허브>를 보고 있으면 우리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영화 몇 편이 스치고 지나간다. 딸과의 이별을 앞두고 있는 어머니가 '죽음 이후'를 대비하는 모습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정원(한석규)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질 준비를 하는 걸 연상시킨다. 어머니와 자식 간의 애증에 얽힌 가족사는 <말아톤>에서 보았던 것들이다. 이런 류의 영화가 노리는 바는 명백하다. 동서고금을 통해 숱하게 반복돼 온 전형적 이야기를 새롭게 포장해 내놓는 것. <허브>는 상투적이라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신파 멜로드라마가 지닌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의지로 뭉쳐있다.

<신부수업>을 통해 데뷔한 허인무 감독은 낯익은 신파 형식을 취해 비교적 안전하게 대중영화의 꼴을 갖추었다. 신파의 장점은 고루한 이야기와 설정이 용인된다는 점이다. 관객들이 신파 멜로드라마를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뻔한 이야기가 전하는 뻔한 감동이 지닌 불멸의 힘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눈물을 쏟게 할 수 있는 것이 신파 멜로드라마의 사라지지 않는 매력이다. <허브>는 바로 그 '상투성의 힘'에 모든 걸 건다.

배종옥-강혜정 연기 앙상블

이런 류의 영화를 보러갈 때 관객들은 이미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지극한 모성애의 어머니와 그의 가련한 딸이 어떤 과정을 통해 코 끝 시큰해지는 감동을 전할 것인가? 그러니 <허브> 같은 영화가 가야 할길은 명백하다. 관객의 기대를 충실히 충족할 만한 감동적인 에피소드들을 짜내는 것.

이 영화에는 그런 순간들이 몇 있다. 자신이 죽고 난 뒤 상은이 써야 할 물품들을 박스에 정리하는 현숙과 그런 어머니의 속뜻을 알게 된 딸의 몸부림, 암 치료로 속절없이 빠져나오는 머리카락을 소파밑에 숨기는 상은의 행동 따위가 모녀간의 애절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대단히 창의적인 묘사는 아니지만 캐릭터에 대한 강력한 동일화를 일으키는 데 이만한 에피소드들도 없다.

그러나 관습적인 신파 멜로드라마가 매번 관객들이 환대를 받는 건 아니다. 상투적인 이야기를 상투적인 방식으로, 상투적으로 연기하는 배우가 연출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누가 하는냐에 따라 인상은 사뭇 달라지며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감흥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허브>에서 그 막중한 역할을 하는 건 애틋한 모녀 관계로 출연하는 배종옥-강혜정 콤비다. 딸을 위해 모든 걸 헌신하는 어머니와 그 어떤 정상인보다 어머니의 진심을 헤아리는 상은을 연기하는 두 사람은 허투루 호흡을 맞춘 배우들이 할 수 없는 앙상블 연기를 보여준다. 냉혹한 세상에 가련한 딸을 두고 떠나야 하는 미어지는 모성을 연기하는 배종옥의 연기는 깊은 공감을 자아낼 만큼 뛰어나다. <말아톤>의 조승우에 이어 정신지체자 역할을 소화한 강혜정은 또래 배우들에게서 발견하기 힘든 호소력 짙은 연기를 보여준다. <웰컴 투 동막골>의 미친 여자 역할을 통해 무구한 동심의 세계를 표현한 바 있는 그녀는 다시 한번 정상인의 삶에서 유리된 캐릭터를 연기하는 재주가 있음을 증명한다. 여기에 상은과의 굴곡진 로맨스를 이어가는 경찰 역의 정경호 또한 배역에 무리 없이 동화되는 안정된 연기를 보여준다. 이들의 찰진 호흡이 아니었다면 영화의 상투성은 훨씬 두드러져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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