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 지음/ 창비 발행/ 9,800원

윤대녕의 다섯 번째 소설집이 나왔다. 3년간의 노작 8편을 묶어냈다. 집필 시기의 불균형이 눈에 띈다. 유일한 2005년 작 ‘낙타 주머니’를 기준으로 앞으로 두 편, 뒤로 다섯 편이다.

과작(寡作)의 시기를 거쳐 다시금 창작력을 회복한 듯한데, 작가는 친구의 뼈아픈 죽음과 함께 불모의 한 때를 겪었노라 고백한다. ‘낙타 주머니’를 쓰며 심중의 고통이 문학에의 욕구로 전화했다고 하니 이 작품은 작가의 그런 전후 사정을 떠올리며 읽을 때 더 깊은 이해에 당도할 듯싶다.

윤대녕 소설에는 흔히 ‘초월적 세계의 내습’ ‘존재의 비의(悲意)를 찾아가는 여정’이란 평가가 뒤따른다. 이는 남성 화자가 생면부지의 여성과 조우하는 설정이 자주 등장하는 것과 관계 깊다. 이번 작품집 또한 예외가 아니다.

강원도 화천의 군대에서 전역하던 날 ‘나’는 서울행 버스에서 웬 여대생과 말문을 트고(‘제비를 기르다’), 6년6개월 전 산장에서 어색한 밤을 보냈던 여자를 북한산 언저리에서 마주친다(‘연’). ‘못구멍’ 속 젊은 남녀가 부부의 연을 맺게 되는 실마리는 뭔가. 서른 어름 입시학원 강사 기훈의 고단한 꿈 속에 대학 시절 희미한 연정을 품었을 뿐인 후배 명해가 느닷없이 틈입한다.

얼핏 개연성이 약해 뵈는 ‘윤대녕스러운’ 만남은, 그러나 예전보다 단단히 땅에 발을 붙인 듯하다. 버스터미널에서 어깨를 부딪친 여자의 무표정에서 죽음을 감지하고 그 뒤를 좇는 ‘천지간’(1995)이 그렇듯, 작가는 그간 우연한 만남에 비의적 분위기를 유려하게 드리워 독자를 매혹했다.

이런 초월적 아우라가 이번 소설집에선 말끔하게 걷힌 느낌이다. 다시 ‘못구멍’을 보자. 만남은 범상치 않았지만 소설은 연애-결혼-별거-재결합으로 이어지는 남녀의 범속한 생활과 심경을 담담히 따라가는 데에 집중한다. 실리콘으로 메워도 흔적이 그대로인 못구멍의 은유가 그리 심오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읽는 재미가 쏠쏠할 뿐더러 감동의 여운 또한 만만치 않다. 일관된 문학적 화두라 할 수 있는 ‘시원(始原)으로 회귀하고픈 갈망’을 초경험적 지평이 아닌 남루한 일상 속에서 길어내는 윤대녕의 솜씨는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 동시에 충족시킨다.

한 평자의 표현대로 “신파적 일상을 신화적인 것으로 만드는” 작가의 힘을 ‘탱자’에서 느껴보자. 한산에서 가방 한가득 새파란 탱자를 따서 제주로 건너온 고모가 조카인 ‘나’에게 털어놓는 생애는 그야말로 신파다. 절름발이 선생과 야반도주 했다가 “다시 데리러 가겠다”는 언약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부엌데기 노릇을 하는 동안, 선생은 다른 처자와 혼인을 해버린다. 마지못해 시집을 갔지만 남편은 문둥병을 앓다가 자살하고 만다.

어렵사리 키운 아들이 품을 떠난 뒤, 폐암 선고를 받은 고모는 옛 연인을 찾아 한산에 갔다가 함께 살자는 뻔뻔한 청에 돌멩이를 집어던지곤 그 길로 제주를 찾았던 것. “다시 한산에 가보시는 게 어때요?” “그렇다고 탱자가 새삼 귤이 되겠냐?”(p.130) ‘나’는 고모를 위해 새파란 귤을 서리하고, 그리하여 삶의 막바지에조차 떨치지 못한 그녀의 연정은 귤화위지(橘化爲枳)의 신화에 가닿고야 만다.

제비가 떠나간 겨울엔 고독에 침잠해 홀연히 떠도는 어머니를 둔, 모성애에 대한 부재감을 어머니를 닮은 여자들에게서 헛되이 갈구하는 ‘나’를 그린 표제작 ‘제비를 기르다’, 고래등(燈)에 어울리는 ‘고래 등 같은’ 집을 마련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헌신한 노인이 말년에 맞닥뜨린 소통부재와 고립을 그린 ‘고래등’도 윤대녕을 기다린 독자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작품이다. 이번 소설집은 죽음, 고독, 슬픔과 같은 한계상황을 다루면서도 좌절이나 환멸보다는 긍정과 치유를 지향하는, 환한 정조로 그득하다.

올해로 등단 18년째를 맞은, 40대 중반의 윤대녕. 그는 성소(聖所)를 향한 걸음걸음마다 이는 그리움과 갈망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원숙함에 도달한 것일까.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