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을 상상할 것

‘상상력’이 중요한 화두인 세상이다. 상상력이 곧 경쟁력이라느니, 우리의 미래가 상상력에 달려있다느니,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느니,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느니···.

물론 백 번 옳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런 인위적인 구호들처럼 상상력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다. 상상력은 숱한 오해와 왜곡에 시달리고 있는 단어다. 상상력이란 말 앞에 ‘기발한’이나 ‘엉뚱한’이란 관습적인 수식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붙이는 당신이라면 당신은 분명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상상력은 삶 그 자체다. 먹고 자고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든 활동,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아우르는 우리의 모든 것이 상상력에 의해 결정된다. 정확히는 그 모든 것의 질(質)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상상력을 ‘특별한 아이디어’만으로 국한시켜서는 상상력으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어린 시절 누구나 경험했을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어머니가 칼국수나 수제비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치댈 때면, 어린 우리는 으레 그 모습을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지켜보다 반죽 한 귀퉁이를 떼어 달라 어머니를 졸라대곤 했다.

하여 그 희고 몰캉거리는 작은 덩어리를 조몰락거리며 이런저런 모양을 빚어보던 순간의 만족감. 계곡에서의 물놀이, 바닷가나 놀이터에서 모래 장난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정전이 되어 촛불을 켤 때면 그것의 불편함보다 왠지 모를 아늑함과 은밀함에 야릇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비눗방울 놀이, 바람개비나 연을 날리던 추억, 둥실 떠오른 풍선이나 기구에 마음을 빼앗겼던 순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것의 본질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경험한 원초적인 순간들이다. 이런 체험으로부터 일찍이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가 ‘물질적 상상력’이라 명명했던 상상력이 비롯된다.

세계가 ‘물, 불, 흙, 공기’라는 4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세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에 대한 고찰은 주로 자연과학 분야에서 다루어져 왔다. 바슐라르는 그러한 개념을 문학과 예술에 적극 도입하고 심화시켜 새로운 비평의 관점을 제시한 학자로 유명하다.

바슐라르는 한 인간의 믿음, 정열, 이상, 사고의 심층적인 상상체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배하는 물질의 한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의 물질이란 물론 4가지 기본 요소인 ‘물, 불, 흙, 공기’를 지칭하지만, 상상력의 우주 속에서 그것들은 과학적인 의미의 물질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속성 즉 상징적이고 고유한 기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슐라르의 물질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다. 에너지란 곧 잠재된 변화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구조주의자’, ‘과학철학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력의 정체는 시인이나 몽상가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물질적 상상력과 이미지에 대한 많은 저작들을 남겼는데, 그의 저작들은 학술적인 이론서보다는 아름다운 에세이나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잠언록처럼 읽힌다.

<물과 꿈>은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 속의 물을 발견하게 한다. 일상의 어느 한순간 ‘물의 이미지’가 발아(發芽)시킨 특별한 상상력은 우리 스스로는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깊숙이 삼투(渗透)해 있다.

“사람은 같은 강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깊이에 있어 인간 존재는 흐르는 물의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은 참으로 변하기 쉬운 원소이다.”

강물도 인간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감각적 끌림으로 물의 이미지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물이라는 존재가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의 순환과 변모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순환과 변모를 본다.

“물은 운명의 한 타입이며, 그것도 유동하는 이미지의 공허한 운명, 미완성된 꿈의 공허한 운명이 아닌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

물은 흐르고 넘치고 고이고 스미고 증발하고 떨어져 다시 흐른다.

우리는 그러한 물을 가만히 응시하곤 한다. 김이 오르는 찻잔을, 비 내리는 창 밖을, 잔잔함 호수를, 흘러가는 강물을, 넘실대는 바다를. 우리는 물에서 물 이상의 것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시고, 더러워진 것을 물로 씻어내며, 물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고 그릇을 빚는다. 비, 눈, 구름, 안개, 이슬, 우박, 얼음, 폭포, 분수는 모두 물이다.

우리의 몸에는 피와 땀과 눈물과 젖과 양수와 정액 같은 물이 존재한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물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물은 불과 공기와 흙과 섞인다. 우리 모두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듯이.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상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때의 상상은 공허한 망상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꿈의 본질이다. 난폭한 물, 잠자는 물, 부드러운 물, 복합적인 물, 죽은 물, 모성적인 물···.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 속에 또 문학작품 속에 존재하는 그러한 물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바슐라르는 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물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물은 싹을 틔우게 하고 샘을 넘치게 한다. 물은 어디서나 생겨나며,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물질이다. 샘은 억누를 수 없는 탄생, 지속적인 탄생이다. 이토록 커다란 이미지는 그것을 사랑하는 무의식적인 것을 언제나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몽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르시스의 신화와 셰익스피어가 그린 <햄릿>의 오필리어의 죽음과 에드거 앨런 포우가 시와 소설 속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물의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물의 말을 들려준다. 그것을 좀 더 깊고 본질적으로 이해하려는 바슐라르의 시도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력이란 역시 삶 그 자체임을 일깨워준다.

상상력을 상상한다는 것. 삶의 전부와 관련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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