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다쿠마 지음·김경철 옮김 / B&S 발행·9,800원

4년 전쯤 친구에게 물었다. 캠코더를 사려고 하는데 어떤 브랜드가 좋겠냐고. 전자제품 마니아였던 친구는 “음, 좀 비싸도 소니가 좋겠지”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해 소니의 주가는 폭락했고 2만 명이 대량 해고됐다. 기업의 세계에 무감한 탓이겠지만 ‘기술제국’ 소니는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 책은 7년 간 소니의 영광과 추락을 지켜봐야 했던 한 내부자의 열렬한 고백이다. 길지 않은 근무기간이라 여겨질 수 있지만, 무엇보다 저자의 목소리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변두리가 아닌 한복판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봤다는 데 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소니 침몰의 생생한 현장, 책은 그래서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

저자는 1998년 소니에 입사해, 2005년 퇴사할 때까지 PC브랜드인 바이오(VAIO)의 기획자로 일했다. 바이오 시리즈는 쓰러져가던 소니 제국에 한때나마 열정을 불러일으켜 준 히트작이다.

저자는 소니의 창업자인 고(故) 이부카 마사루가 주창한 ‘자유롭고 활달하며 유쾌한 이상공장’을 바이오팀을 통해 목격했다고 한다. 담판으로 마이크로소프트를 무릎 꿇게 만들고 ‘기술에 대한 타협은 고객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던 최강의 바이오 엔지니어들. 이들은 소니 제국을 떠받친 거대한 디딤돌이었다.

그런데 바이오의 성공이 엉뚱한 곳으로 튀기 시작한다. 컴퍼니(Company) 제도의 대표주자로 부상한 것. 컴퍼니 제도는 세간의 찬사와 달리 소니에겐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사업부별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는 탓에 영역 갈등과 불필요한 경쟁·중복투자가 일어났다. 최악은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연구개발팀이 각 컴퍼니에서 외면당한 것이다. 바이오는 수평분업의 세계인 PC산업에서 수직통합의 힘, 즉 아무나 만들어 낼 수 없는 기술의 아성을 구축했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거대 컴퍼니의 역할을 요구받은 바이오팀은 싸지만 특징이 없는 보급형 모델을 시장에 내놓는다.

경영진은 간단한 끼워넣기로 돈을 만지게 되자 더 이상 기술개발이라는 고비용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팔리는 것만 만들라’는 분위기가 조직 전체를 짓누르고 타협을 거듭해가던 끝에 바이오 후속모델은 평범한 제품으로 전락한다. 싸구려 부품을 조립해 저가공세를 펼친 델의 컴퓨터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것이 된다.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 세계 최고의 기업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은 소니의 치부가 드러난다. 성공적인 CEO로 알려진 이데이 노부유키 회장의 등장부터가 오판이었고 그는 제조업을 싫어했다는 것 등등.

어쨌든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로 모아진다. 소니 침몰의 원인은 장인정신을 잃어버리고 엔지니어들을 쫓아냈다는 것. 잘못된 성과주의에 집착하는 바람에 사내에 기술경시 풍조를 만연시켜 조직을 급속히 망가뜨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소니만의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제조업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좇다 기술을 잃어버린 격이랄까. ISO 9000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격렬한 것도 이 때문이다. “ISO란 어디까지나 표준화의 지표로, 고품질이나 개성이 아니라 균질화를 평가하는 지표다. 이는 선진 제조국인 일본을 향해 투하된 핵탄두와 같은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가 절대선(善)인 시대, 독창성을 강조하는 장인정신을 외치는 것은 철 지난 구호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내부고발자의 목소리는 편견의 포로일 수도 있다. 또 이데이 회장은 일개 사원이 보지 못하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었다고 반박할지 모른다.

하지만 비교를 거부하는 제품을 만들어내던 소니가 삼성전자의 기술을 빌어 간신히 LCD TV를 만들어내고 더 이상 제대로 된 스피커를 만들지 못하는 현실이라면 저자의 비판도, 비관도 무리는 아니다. 실험정신과 컨셉을 잃어버린 소니가 더 이상 소니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최고의 기업이라도 위기에 처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지 기억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리고 제조업의 기본이 무엇인지도. 중국에 밀려 제조업이 점점 공동화(空洞化)되어 가는 한국 기업들 역시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그 어떤 변명거리가 있다 해도 기술개발과 투자를 기피하는 기업의 미래는 소니의 전철을 밝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선영 기자 philo94@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