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바벨탑이 무너지고 소통의 문이 열리는 순간…졸지에 테러리스트가 된 모로코 소년의 비극, 세 개의 사건으로 비춰본 세계의 풍경
기예르모 아리아가라는 1급 각본가, 최고의 촬영감독인 로드리고 프리에토와 줄곧 호흡을 맞춰 온 그는 시공간적으로 무관해보이는 사건들이 어떻게 교묘하게 연결돼 서로 영향을 미치는가를 추적한다. 분리된 에피소드들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방식은 이냐리투-아리아가 콤비의 전매특허다.
아무런 영향도 주고받지 않을 것 같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모종의 이유를 통해 만나고 서로에게 간섭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풍경이 그려진다. 그런 의미에서 <바벨>은 이냐리투의 앞선 두 편에 이어지는 '3부작'이라 부를 만하다. 3부작은 모두 우연적으로 촉발된 사건과 만남이 불러오는 비극을 전경화한다. 비극의 원인은 인간들 사이에 놓여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다.
문화적 차이에 의한 불화와 의사소통의 단절은 <바벨>이 중심으로 삼고 있는 주제다.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사슬
시간과 공간이 섞이기는 하지만 <바벨>은 <아모레스 페로스>나 <21그램>처럼 초장부터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물과 사건을 꼬아 드라마를 만드는 것은 동일하지만, <21그램> 마냥 이야기가 중간에서 시작하는 듯한 황당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이집트 모로코의 산악지대에 사는 양치기 소년 유세프와 아흐메드에게 어느 날 갑자기 장총 한 자루가 주어진다. 황량하고 무료하기만 한 사막에서 즐길 거리가 없었던 두 소년은 총알이 발사되는 거리를 두고 내기를 건다. 장난 삼아 시작한 놀이는 산 아래를 달리는 관광버스를 표적으로 계속된다. 미국에 거주하는 멕시코인 아멜리아는 아들의 결혼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가야하지만 유모로 일하고 있는 주인집의 부모는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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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 퍼즐을 만들어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미국인 여행객은 별안간 날아온 총탄에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총쏘기 놀이를 벌였던 모로코 소년들은 졸지에 테러리스트로 간주된다.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사건이 빌미가 돼 시작된 도미노적 비극은 전 지구적 규모로 비화돼 간다. 복잡한 이야기를 특징으로 하는 이냐리투의 무대는 한 마을(<아모레스 페로스>) 혹은 도시(<21그램>)에서 세계적인 규모로 커졌다.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네 이야기 단위들은 시간이 갈수록 각자에게 영향을 미쳐 거대한 현대 사회의 벽화를 완성한다. 이냐리투 감독은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비극이 21세기 현대사회의 구조와 환경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세 개의 에피소드를 연결시키는 것은 '사막'이라는 공간이다.
세 개의 분리된 이야기를 연결시켜주는 장총을 통해 이냐리투는 세계의 절망이 부지불식간에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으로 얻은 명성은 이냐리투에게 더 좋은 제작환경을 선물해줬다.
할리우드 톱 스타 브래드 피트가 제작자 겸 배우로 참여했고, 케이트 블랜챗,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야쿠쇼 코지 등 연기 잘하는 다국적 배우들을 데리고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위기에 빠진 세계의 풍경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3부작이 일관되게 추구해 온 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에 대한 모종의 ‘위기의식’이다.
그것은 증오와 복수가 만연한 시대의 분위기가 어떻게 세계를 포위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정치한 탐문 작업과 같다. 시공간의 단면을 베어낸 것처럼 예리하게 세계의 문제를 파고드는 이 심란한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우리의 문제가 겹쳐진다.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증오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차근차근 곱씹게 만든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성서의 '바벨탑 신화' 마냥 <바벨>은 천형을 짊어진 비극적인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비극의 시초는 ‘소통할 수 없음’에서 온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피상적인 이유 외에도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의 의중을 알지 못한 채 미끄러지는 대화만을 나눈다.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의 카메라는 이 같은 절망의 깊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그의 촬영은 보는 이의 감정의 온도를 몇 도쯤은 높여 놓는다. 시종일관 대상에 밀착해 사건을 체험하게 만드는 카메라는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절망적인 상황을 우리의 상황으로 받아들이라는 선동적 외침처럼 들린다. 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밝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선뜻 긍정의 답변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두 편의 전작들에 이어, <바벨>은 자성을 촉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사건들이 실은 내밀한 관계망 안에서 연결돼 있다는 것. 이냐리투의 비극 3부작은 그 간과된 진실을 말하고 있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공개됐을 때, 기대에 버금가는 반향을 일으킨 이 영화는 얼마 전 열린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데 이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가장 강력한 작품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바벨>은 미국 밖 이방인들에게 마음을 여는데 인색한 할리우드에서 멕시코 감독 이냐리투가 거둔 성공이 우연히 아님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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