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발행·448쪽·23,000원

미학자 진중권 씨는 근저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한국인의 습속엔 근대화를 제대로 겪지 못한 후유증이 있음을 지적한다. 뭐든 남들과 똑같아야 하고 삶을 아름답게 고양시키는 데 도통 무관심한 것 등.

그렇다면 유럽이 중세의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 근대를 열어나갈 때, 반대편 조선 땅에 살았던 지식인들에게는 아무런 자각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18세기 조선에도 변화의 움직임은 뚜렷했다. 다시 말해 자생적 근대화의 씨앗이 이 시기에 움트고 있었다는 말이다.

<미쳐야 미친다>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 등 맛깔스런 고전 읽기로 대중에게 다가선 국문학자 정민 교수의 18세기 조선의 7년 연구 묶음이 책으로 나왔다. 저자는 박지원, 이덕무 등을 공부하며 18세기에 무언가 특별한 구석이 있음을 감지한다. 전에 없이 매력적이고 생동감 넘치던 시절,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저자가 ‘발견’해낸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가장 큰 특징은 ‘미친 바보’들이었다는 점이다. 미친 듯 몰두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는 몰입의 상태, 벽(癖). 어리석은 정도가 지나쳐 바보로 보이는 상태, 치(癡). 한마디로 말해 못 말리는 병, 현대의 마니아 문화가 18세기 조선에 있었다는 것이다.

박제가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 말하며 예찬론을 펴는데 그 ‘미친 바보’ 동무들의 모양새는 대략 이렇다. 평생 <옥해(玉海)>란 백과사전을 끼고 살던 이의준은 집에 불이 나자 책을 구하려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목숨을 잃었다.

판서 윤양래는 탈상(脫喪)한 집을 찾아가 상복과 두건을 모아오는 상복벽이 있었다. 또 호가 석치(石癡), ‘돌에 미친 바보’인 정철조는 보이는 대로 돌을 파서 벼루로 만들었고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는 밀랍으로 매화까지 만드느라 열심이었다. 이 밖에도 괴석, 칼, 꽃그림 등에 보여준 선비들의 열정은 확실히 도를 넘었다.

그런데 멀쩡한 선비들이 왜 이렇게 미쳤을까. 저자는 새로운 문물의 경험과 수용을 원인으로 든다. 인식의 대전환이 일어난 것. 오랑캐의 나라에 가서 눈으로 직접 보니 재화는 넘쳐나고 거리의 서점마다 책들이 쌓여 있다.

서양 과학문명을 알고 보니 지금까지 배워왔던 지식이 들어맞지를 않는다. 정주(程朱)의 학문을 책상머리에서 앵무새처럼 되뇌며 살았던 세월이 무참할 정도로 지식인들이 받은 충격은 컸을 것이다.

이제 ‘저기의 도(道)’를 추구하던 가치관은 ‘여기의 진실’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그 결과물이 실사구시의 합리성 추구와 정보의 재편. 무엇이든 기록하고 정리하며 책을 만들어낸다. 비둘기, 화훼 기르는 법에서 평양기생 인생역정 인터뷰까지 쓰지 못할 건 없다. 여기서 최고의 편집자요, 지식경영의 귀재였던 정약용이 유배생활 17년간 기획해낸 책들의 연도별 작업표는 실로 놀랍다.

주체의 각성 역시 근대성의 중요한 지표 중 하나다. 박지원의 재맹아(再盲兒) 설화는 이를 힘주어 깨우친다. 장님이 길가는 도중에 눈이 뜨였는데 집을 찾아갈 수가 없다.

답은 도로 눈을 감고 집에 가서 눈을 뜨라는 것. 바뀐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나’를 세운 뒤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의 문화만 좋다고 여겨 조선의 주체성을 버린다면 새로운 길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모든 열정은 미완의 ‘가능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들은 비주류였고 억압 받았으며 매도 당했다. “민족문화의 주체성과 외래문화의 건강한 결합을 모색했던 지식인들은 양지로 나오지 못하고 익명성의 그늘 아래서 잊혀져 갔다. 여기에 우리 18세기의 비극이 있다”는 저자의 말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하지만 새 시대에 대한 도전과 좌절이 과연 의미 없는 몸짓은 아니었을 터. 무엇을 바꿔야 하고 지켜야 하는지 올바르게 판단하는 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요한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복되는 논의나 인용이 거슬린다고 미리 밝혀뒀지만, 사실이 그렇다. 본문을 읽은 후 서설로 전체를 조망하는 게 반복의 지루함을 더는 한 방법일 수 있겠다. 학문적 성과가 드러나는 2부와 일반에게 생소한 이용휴 등의 사유세계를 읽는 3부는 다소 딱딱하지만 옛글을 풀어 읽는 재미를 즐긴다면 인내는 달 듯하다.


박선영 기자 philo94@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