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라비·니콜라 윌로 지음·배영란 옮김 / 조화로운삶 발행·320쪽·13,000원

정류장에서 지나치는 버스 뒤꽁무니의 매연을 연거푸 들이마실 때, 붐비는 대형마트에서 쫓기듯 물건들을 마구 살 때 도시생활이 숨막히고 소비하는 것이 피곤하다고 느껴진 적이 있는가. 눈만 뜨면 경쟁력을 외치는 우리 사회에서 아이를 기른다는 압박감은 또 어떤가.

거창하게 ‘신음하는 지구를 구하자’가 아니더라도 뭔가 답답한 느낌 말이다. 만약 그런 순간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지루한 딴 세상 얘기가 될 수 있겠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과연 단 1분도 그런 일이 없었을까.

프랑스의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와 녹색운동가 니콜라 윌로. 책은 두 사람의 대담집이다. 우리에겐 생소한 인물인 탓에 ‘생태운동을 하는 사람들끼리 맞장구나 치겠군’이라고 지레 짐작할 수도 있지만 이 둘의 만남은 ‘초록은 동색’이 아니다. 먼저 물질주의적 환경이 싫어 시골 마을에 정착, 친환경 농업의 선구자가 된 라비는 ‘소비자’라는 말조차 마음에 안 들어하는 급진적 이상주의자다.

그에 비해 윌로는 20년째 프랑스 민영방송 TF1의 환경프로그램의 제작·진행을 도맡아 수백만 시청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그래서 “기업체에 돌을 던지기보단 이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자다.

대화는 처음부터 미묘한 균열을 드러낸다. “넘치게 가질 수 있다면 가져라”는 윌로의 말에 라비는 바로 위험한 주장이라 응대하는 것. 또 “인류의 문명을 화석연료의 힘으로 지탱해 나가게 하는 과학적 발명은 크나큰 사고”라는 라비의 지적에 윌로가 과학기술이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지 않았냐고 되묻는 것도 그렇다.

문제의식은 공유하나 관점과 대응방식이 다르다. 라비의 ‘지속적인 마이너스 성장’과 윌로의 ‘지속가능한 발전’은 그 대척점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아껴서 오래 쓰자’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마이너스 성장은 무얼 말하는 걸까. 안 그래도 성장률이 떨어졌다며 보수언론이 호들갑을 떠는 나라의 국민으로선 ‘마이너스’란 말 자체에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라비의 답은 이렇다. 성장과 부의 축적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화석 에너지 중심의 구조에서 탈피해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 소박하게 아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돈만 된다면 에너지가 바닥이 나건 지구가 만신창이가 되건 상관없이 퍼내는 것은 이제 그만두자는 말이다. 그리고 마이너스 성장이 바로 지속가능한 발전의 첫걸음이라고.

어리숙하게 보이는 농부 아저씨의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삶에 대한 그의 철학에 있다. 소비자나 시민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아름답고 명랑한 삶을 꾸려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게 아니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생산적 인간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휘둘려 살아가는 건 인간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연의 속도에 맞추지 않고 시간과 분투하는 사이, “떠나가는 건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라는 말이 깊이 남는다. 라비의 급진적 이상이 현실에서 싹을 틔운 예도 적지 않다.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 친환경 농법을 전수해서 가난한 농민 10만 명이 토양을 파괴하지 않고 자급자족의 토대를 닦게 했다. 또 2002년 프랑스 대선에 출마, 4개월의 선거운동으로 국회의원 184명의 지지를 받아냈다니 별난 사람이다.

물론 ‘검소한 풍요’도 괜찮지 않겠냐며 절제의 미덕을 강조하는 윌로의 실용노선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오랜 시간 미디어를 통해 환경운동의 내용을 퍼뜨리고 의식의 각성을 일깨운 작업 또한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유와 소비가 존재의 이유가 되는 물질주의를 재고해봐야 한다면서도 시장주의는 건드리지 않는 그의 언설은 다소 모순된다는 평가를 떠올리게 한다.

자연이 1만여 일 동안 생산해 낸 것을 단 하루에 소비하는 인간들. 그래서 행복하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기주의의 덫에 걸려 삶이 메말라가고 있다면? 책이 주는 성찰의 시간은 어느새 건강한 삶에 대한 욕망을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듯하다.


박선영 기자 philo94@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