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취재수첩에 묻어있던 김승웅 지음 / 김영사 발행 284쪽 9,500원

회억(回憶). 돌이켜 추억한다는 뜻으로 보아 책은 회고록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점잔빼며 덤덤히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솔직하다 못해 욕이 터지고 격정이 넘친다.

게다가 댓글까지 달려 있어 마치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는 착각까지 들게 한다. 30년 가까이 기자생활을 한 저자의 이력을 떠올리면 현장감이 살아있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건조한 기사체 속에 어떻게 이런 다양한 감성을 담을 수 있었나 싶어 궁금하다.

답은 저자의 포부가 닿아있는 저널리즘 문학. 수십 년 전 취재수첩에 켜켜이 쌓여진 사실들을 감성 어린 문체로 되살려냈다고 할까. 물론 시작은 한없이 투명했던 젊은 날의 흔적부터 더듬는 것이지만.

책의 시작점은 40여 년 전이고 마침표는 20여 년 전이다. 댓글 속의 1959년생도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는 시간대라 할만큼 잡히지 않는 시절이다.

사라지고 잊혀진 것들이 많을 수밖에. 서울대 문리대, 펄펄 끓던 한국일보와 창간 사주 왕초 장기영, 국제공항으로 위용을 뽐내던 김포, 그 자신 독재자를 닮을까 경계를 늦추지 않던 제정구…. 개인의 삶으로만 읽히기엔 시대의 호흡이 너무나 뜨겁고 생생하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1960년대 청춘의 낭만과 열정이, 사회인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전국의 인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던 한국일보 편집국 풍경은 그리움의 또 한 자락이다. 화요일 아침이면 기자들을 모아놓고 사자후를 토하던 장기영. 그 사주에게 친구 만나 술 한 잔 살 돈이 없다며 월급을 올려달라 배짱을 부리던 저자의 좌충우돌과 ‘지금도 깨어보면 중학동 술집’이라는 너스레엔 그 시절의 향수와 웃음이 절로 묻어난다.

하지만 의기양양한 모습만 있는 건 아니다. 어엿한 출입기자가 된 김포시절, 사사건건 기사를 검열하는 중앙정보부의 간섭에 저자는 무정부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고통과 모욕을 남의 것인 양 객관화시키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만 같지만 꼭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인물, 제정구 의원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과 10·26 사건을 겪으며 이 땅을 떠나는 대목까지는 부끄러움과 자기반성이 교차한다.

이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에 ‘댓글’이라는 21세기의 형식이 따라붙은 건 역시나 인터넷 덕분이다. 재외동포 포털에 연재한 저자의 칼럼마다 지인들이 기억을 보태고 응원을 보내 ‘글 속의 글’로 알차게 자리잡은 것. 원로 언론인들이 ‘~형’, ‘말코야~’ 라며 나름의 의견을 내보이는 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칭찬도 쉽게 내뱉지 않는 직업적 기질이 엿보인다고 할까. 저자의 글 역시 쌍방향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며 갑자기 아무개에게 보내는 사과와 다짐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처가에 처음 인사오던 날, 별 볼일 없는 놈이라는 말에 섭섭했다는 조카사위의 댓글을 읽고 “양 서방 잊어라, 잊어. 이 삼촌이 잘못했다”라든가 변변히 지닌 것도 없던 학창시절 빌린 돈이 마음에 걸려 국회의원이 된 친구에게 월급을 가불해 차를 사 보냈다며 “부영아, 이제 너한테 진 빚은 없는거야”라고 하는 등.

‘6070세대’라면 저자가 펼쳐놓는 파노라마를 보며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꼭 그 세대가 아니라도 공감할 부분은 적지 않다.

우리가 무심히 잊고 지나쳐 버린 아버지 세대의 젊음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고난의 시대를 헤쳐간 열정과 아픔도 충분히 들어볼 만하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역사 속에서 지난날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어 기록의 가치도 빛난다. 결국 거대한 역사란 것도 알고 보면 사람 이야기에 다름 아닐 테니까.


박선영 기자 philo94@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