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 지음 / 북폴리오 발행·271쪽·12,000원

1600년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 일본의 패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본거지를 에도, 지금의 도쿄로 옮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머물렀던 오사카는 새로운 시대의 수도로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4위의 황금상권을 자랑하는 도쿄의 긴자(銀座)는 그렇게 출발했다. 은화 주조소를 뜻하는 이름을 얻은 건 메이지 유신 다음 해인 1869년. 긴자는 본격적으로 풍요의 코드로 자리잡게 된다.

도쿠가와 막부의 품에서 태어났지만 근대화의 세례를 받고 더 화려하게 피어난 긴자, 그 거리엔 세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제대국의 원천이 숨겨져 있다.

긴자백점회에 가입한 100년이 넘는 노포(老鋪)만 147개. 외길을 걷는 장인 전통을 높이 사는 일본의 문화 덕이라 생각하고 지나치기엔 놀랍다. 책은 이 중 18곳을 골라 그 속에 숨은 일본의 경영 노하우를 살핀다.

먼저 긴자 상인의 태도부터가 다르다. 다카하시(高橋) 양복점의 전 직원은 헬스클럽서 몸매관리를 하며 자신들이 만든 양복의 맵시를 직접 보여준다.

또한 이들 모두가 재단사이자 판매원으로 고객의 요구를 100% 수용해 옷을 만든다. 우리 돈으로 수백만원을 호가하지만 고객이 결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만들기 위해서다.

긴장하고 또 긴장하며 최고의 품질을 지키는 건 긴자 상인의 덕목이랄 수 있다. 그러한 태도는 한우물을 파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전 세계 식료품이 다 모인다는 메이디야(明治室)는 유통 본업 이외의 사업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 수입물품을 쌓아놓기 위해 많은 물류창고가 필요하지만 그 명분으로 부동산 투자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

3대 이소노 나가조 사장은 “상인은 물건을 파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140년 전 아이스크림을 팔던 약국 시세이도(資生堂)의 사장 후쿠하라 요시하루의 말도 다르지 않다. “이것저것 손을 대 본업이 무엇인지 몰라서도 안 된다. 한국재벌은 무엇이 전문인지 알 수 없다.” 문어발이 아닌 이 회사의 매출은 6,212억엔, 한화로 약 5조원이다. 세계 화장품업계 4위 규모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상인이라도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는 없는 법. 1923년의 관동대지진과 45년의 패전은 커다란 시련이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장사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긴자의 불빛도 스러지는 듯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위기를 극복했고 그 돌파구는 쉼 없는 혁신에서 나왔다.

문방구 이토야(伊東室)는 그때까지 물건 하나하나를 일일이 계산해주던 방식에서 탈피, 장바구니에 담아오면 한꺼번에 계산하는 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4대 사장 이토 고지의 ‘볼록렌즈 경영’도 인상적이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팔자’로 요약되는 이 경영법은 차별화된 점포 운영으로 드러난다. 7개의 점포별로 비즈니스, 디자인, 취미생활자, 주부를 위한 문구용품을 달리 진열하는 것이다.

가장 전통적인 의상 기모노의 소품을 파는 긴자 구노야의 판매시점관리시스템(POS)은 또 어떤가. 물건이 판매됨과 동시에 전 사원이 고객의 선호도를 알 수 있고 그를 바탕으로 세일즈 프로모터가 물건구매와 진열을 결정하는 방식은 첨단기기를 파는 상점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책은 긴자의 노포엔 시간(전통)의 힘에 빌붙어 거드름을 피우는 상인은 없었음을 말해준다. 고객을 위한 최고의 품질을 판다는 자부심으로 혁신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전통의 본질이다. 그것은 자고 나면 승자가 바뀌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고수들의 교훈이기도 하다.

다만 경영 노하우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밑줄 긋기를 원하는 독자라면 부족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노포 기행이 더 어울릴 만큼 단순히 상점 소개에 그친 경우가 적지 않은 까닭이다. 다만 일본 문화의 원류 기행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신용이란 결국 최고의 품질에서 나온다’는 소박한 상도(商道)를 배우고자 한다면 흥미롭게 읽힐 듯하다.


박선영 기자 philo94@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