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저당잡힌 하류인생들의 랩소디

자꾸 심란해진다. 마치 우리가 잘 아는 어떤 선술집에 앉아, 바로 옆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목격하는 기분이다. 너무 리얼해서 마음이 착잡해진다. 극의 후반부로 접어들면 객석의 훌쩍거리는 소리와 한숨이 더께처럼 앉는다. 마음이 무겁다. 인생이, 살아있는 시간이 새삼 더 숙연해진다.

창작뮤지컬 <밑바닥에서>가 서울 대학로 열린극장에서 펼쳐지고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막심 고리끼의 원작 <밑바닥>을 한국형 창작뮤지컬로 대담하게 해체하고 재조립한 작품이다. 제작 프로듀서 박용전이 극본, 연출, 작곡, 작사 등을 모두 맡았다. 한 사람의 창작물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전반적으로 짜임새가 탄탄하다. 대극장용 작품을 미니어처로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청년 페페르가 라이터를 켜는 소리로 극이 시작된다. 공연은 러시아의 허름한 선술집을 들락거리는 8명의 하류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까스트일로프 백작을 대신해 감옥에 들어갔다가 갓 출소한 청년 페페르, 술집여급 출신이자 페페르의 옛 연인이었던 백작 부인 바실리사, 병든 동생 안나를 돌보며 꿋꿋이 술집을 꾸려나가는 여주인 타냐, 젊은 매춘부 나스짜, 사기도박꾼 사친과 조프, 그리고 알콜 중독으로 폐인이 된 전직 배우가 있다. 그 앞에 맑은 영혼의 여인 나타샤가 새 종업원으로 나타나면서 서서히 희망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병든 안나는 죽고, 바실리사는 페페르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며, 나타샤와의 사랑에 빠진 페페르는 백작과의 실랑이 중에 실수로 백작을 죽이고 만다. 페페르의 변심에 배신감을 느낀 바실리사는 경찰에 페페르를 고발하기에 이르고, 이를 피해 페페르는 황급히 먼 길을 떠난다. 페페르를 사랑한 나타샤 역시 마침내 선술집을 떠난 뒤, 가까스로 재기를 다짐하던 전직 배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공연은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바로 몇 장면을 놓치게 될 만큼 이야기의 전개 속도가 빠르고, 역동적이다. 나타샤 역에 홍민희, 페페르 역에 이동수, 그리고 하선경과 박윤희, 지현 등이 각각 타냐와 싸친, 나스짜 역으로 출연해 열연을 벌인다. 전반적으로 배우들의 연기와 가창력이 뛰어나다. 타냐와 나타샤의 노래, 나스짜의 도발적인 춤과 표정, 그리고 싸친의 능청 연기 등을 주목해볼 만하다.

특히 대부분 솔로로 이뤄진 총 14곡의 삽입곡이 뮤지컬의 감동을 고조시킨다. 노래 편성에도, 각 멜로디나 노랫말에도 군더더기가 없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밑바닥의 절망감과 절규, 희망에 대한 애처러운 기대와 환희가 매혹적으로 구사되어 있다. 2005년에 초연된 이래 올해로 총 400회 공연을 돌파, 제 11회 한국뮤지컬대상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시간의 공연 내내 거의 똑같은 세트를 배경으로 긴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단조로움을 느낄 수 없다. 그 일부는 조명의 공로로 보인다. 협소한 공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조명의 위치나 각도의 높낮이까지 치밀하게 계산해 장면마다 빛의 효과를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결론적으로 유쾌한 인생을 꿈꾸는 관객들에게는 그다지 입맛에 맞지 않을 역작이다. 해피엔딩에 대한 관객들의 비장한 기대와 상관없이, 공연은 끝까지 비극으로 마감된다. 삶이 ‘공수래 공수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일상에서든 무대에서든 내내 희망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이 심리는 대체 무엇일까? 29일까지 공연한다.


정영주 객원기자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