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지음/ 학고재 발행 11,000원

“지금 성 안에는 말(言) 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 또한 말(馬) 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 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197쪽).

임금이 비린 말 피를 마시고 형제의 예를 맺은 정묘년(1627년, 인조5) 이후 9년, 청나라의 칸은 군신의 예를 요구하며 조선의 땅을 유린한다. 1636년 병자년 겨울의 일이었다.

소설가 김훈의 세 번째 역사소설 <남한산성>은 그 무참했던 겨울을 깨워 삶의 길을 묻고 있는 책이다. 강화로 파천하려다 길이 막혀 산성에 웅크려 앉은 47일간, 임금은 무력했고 사대부는 말이 높았으며 민초들은 지쳐갔다.

그들이 얼고 굶주리며 견디지 못할 것을 견디고 있을 때, “말들은 부딪치고 뒤엉키며 솟구쳐 오르다가 가라앉았다”(190쪽).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척화의 말은 의로우나 생을 가벼이 여겼고 화친의 말은 생을 열어주나 죽음과 다름없는 치욕이었다.

척화파 김상헌은 죽음으로 사직을 지킬 수 있다 믿었고 ‘만고의 역적’을 자처한 최명길은 살기 위해 가지 못할 길이 없다 믿었다. 청나라 10만 대군에 포위된 작은 성은 변변한 싸움 한 번, 끼니 한 번을 챙기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하루하루 말라갔다.

익히 알려진, 그러나 실록 한 귀퉁이에 감추고 싶은 치욕의 역사를 작가는 차갑고 단단하게 써내려간다. 가마니를 뜯어 말을 먹이느냐 군병을 녹이느냐를 두고 싸우고, 밴댕이젓을 토막내는 일까지 임금의 하명을 재촉하는 아수라장.

싸울 줄도 모르는 선비들이 “명길을 목 베라” 목청만 드높이다 제 살길을 찾아 성을 빠져나가는 대목은 민망하다. 하지만 모질게 들춰지는 행간의 쓰라림 속에서 작가는 시비를 따지지도 누군가를 편들지도 않는다.

임금의 뒤를 따라 송파나루를 건넌 김상헌이 사공의 목을 벨 때,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을까.

청병 또한 건네주고 곡식을 얻어 겨울을 나련다는 사공의 무심한 말 한마디가 그른 것인지, 사직을 지키고자 백성의 목숨을 거둔 김상헌의 칼이 그른 것인지. 다만 울음을 삼킬 뿐이다. 최명길이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어서 위로할 수 있는 것, 치욕이 기다리는 넓은 세상을 향해 성문을 열고 나가야”(236쪽)한다고 말할 때 겹쳐지는 건 그의 정갈한 생활이다.

노복이 성첩으로 끌려간 뒤 손수 걸레를 빨아서 방바닥과 툇마루를 닦는 선비의 모습은 목숨을 구걸하는 이의 그것이 아니다. 말을 아끼는 임금, 인조는 어떤가. 삶과 죽음이 뒤엉키는 곤궁한 자리에서 선택은 군왕의 몫.

화친의 글을 지었다는 치욕을 감당 못해 신하들은 매를 바라고 심장이 터져 죽고 얕은 꾀를 쓴다. 그래서 임금을 이긴다. 오랑캐의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으며 온몸으로 치욕을 받아내는 몫은 결국 임금이다. “흙냄새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득한 날들이 흔들렸다”(355쪽).

김훈의 문장은 여전히 단단하고 거칠 게 없다. 먼 시간을 거슬러 불러내고 만들어낸 인물들의 면면 역시 낯설지 않다.

하지만 역사 속 개인의 존재에 천착했던 전작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글 마디마디에 뼈가 있어 멈칫하는 순간이 잦지만 쉬이 읽힌다. 아마도 죽음과 가깝던 존재의 나침반이 삶으로 옮겨진 탓이 아닐는지. 삶이란 하루하루 치욕을 견디는 것.

불가피하게 더럽혀졌지만 살아내야 하고 살아낼 수밖에 없는 것. 어쩌면 죽음보다 더 무겁고 아득한 이름이 삶이다. 책은 그 처절한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꾸역꾸역 살아낼 수 있는 이유도 보여준다. 냉이국 한 사발에 가슴 뜨뜻해지는 설렘, 새로운 봄과 성 밖으로 난 길, 대장장이 서날쇠의 화덕 속에서 피어날 날들이 그것이다. 생은 그리하여 의미를 갖는다.

어디 남한산성뿐이고 옛사람들뿐일까. 여전히 우리는 난무하는 ‘말’들의 칼날 위에서 한바탕 삶의 굿판을 벌인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어 땅으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작가의 말은 그래서 오랫동안 눈길을 붙든다.


박선영 기자 philo94@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