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악녀의 공식은? 일단 돈이 많다. 돈 많은 부모를 만났거나 남다른 실력으로 일에서 성공해 부를 쌓았다. 물론 둘 다 해당되기도 한다.

또한 섹시하다. 화려한 옷차림과 화장으로 매력을 과시한다. 가진 것 없지만 착하고 씩씩한 여주인공과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맞아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랬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 속 악녀 캐릭터가 변화하고 있다. 공식대로 척척 맞아떨어지며 스테레오 타입으로 고정돼 온 악녀 캐릭터는 새로운 개성을 부여받으며 변신의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화려하고 도도하기만 했던 악녀 캐릭터가 초라한 면모를 지니기도 하고, 얄밉게만 여겨졌던 악녀가 불쌍하기도 하고 때론 무섭기도 하다. 이른바 악녀 캐릭터 진화의 시대인 것이다.

MBC 일일극 <나쁜 여자 착한 여자>는 악녀 캐릭터 변화의 단적인 예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극중 ‘나쁜 여자’인 성현아는 의사라는 전문직을 지녔고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점에서 악녀의 공식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

나쁜여자 착한여자-하늘만큼 땅만큼

남편이 있음에도 옛 연인과 불륜을 즐기며 ‘착한 여자’ 최진실를 괴롭힌다. 그러나 불쌍하다. 사랑 때문에 모든 걸 잃는다. 더 독한 악녀 유서진에게 협박을 당하기까지 한다. 참 안쓰러운 악녀인 셈이다.

KBS 1TV 일일극 <하늘만큼 땅만큼>의 악녀 강정화도 기존의 공식에서 상당한 변화의 과정을 겪는 캐릭터다. 부잣집 딸로 태어나 화려한 미모를 과시하는 한편, 이기적인 성격으로 얄미움을 ‘팍팍’ 풍기는 점은 공식 그대로다.

그렇지만 주위 환경에 많이 끌려다니는 수동적인 성향을 지닌 점에서 적지 않게 동정심을 유발한다. 개과천선의 가능성이 곳곳에서 엿보이는 점에서 새로움이 느껴진다. SBS 수목 미니시리즈 <마녀유희>의 전혜빈, SBS 주말 특별기획 <푸른 물고기>의 박한별 등도 강정화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악녀들이다.

MBC 특별기획 <케세라 세라>의 윤지혜는 악녀 캐릭터의 두드러진 진화로 낯설게 여겨지기까지 하는 캐릭터다. 보통 역대 악녀들이 얄미운 여우의 이미지가 강했다면 윤지혜는 무서운 암호랑이의 이미지다. 나직한 목소리로 공격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그의 모습은 화려하고 도도한 기존 악녀와 전혀 다르다.

또한 위선적이지도 않다. 솔직담백하고 시원시원하다. 얄미운 구석은 찾아볼 수 없고 위압감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미스터 Q>의 송윤아, <겨울연가>의 박솔미, <천국의 계단>의 김태희 등 돋보였던 악녀들이 여주인공에게 악랄하게 굴다가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착한 척했다. 그러나 <케세라 세라>의 윤지혜는 누구 앞에서나, 심지어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도 독설로 일관한다.

사실 지금까지 드라마의 여주인공과 악녀는 현실 세계의 인물이라고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특히 재벌가의 딸로 능력도 있지만 성격만큼은 못된 악녀의 전형은 현실에 발붙이기 쉽지 않은 캐릭터다. 그러나 악녀 캐릭터의 진화는 악녀를 현실 세계로 끌어내리고 있다.

시청자들이 악녀 캐릭터를 멀게만 느끼기보다 공감하는 상황도 접하게 되는 이유다. 여주인공보다 악녀가 더 응원을 받는 사례도 간간이 등장하는 게 사실이다.

여주인공을 대표하는 캐릭터인 캔디형 또는 신데렐라형 캐릭터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왔다. 물론 여전히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캔디’나 ‘신데렐라’로 대표되는 게 사실이지만 스테레오 타입에선 어느 정도 자유로움을 얻어가고 있다.

이와 함께 악녀를 대표하는 이라이저나 신데렐라의 새언니 캐릭터도 진화에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오로지 여주인공을 괴롭히기 위해서만 나타나는 얄팍한 캐릭터에서 벗어나 나름의 사정을 안고 가슴앓이 하는 이유 있는 악녀들이 등장하고 있다. 얄밉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악녀가 자주 눈에 띄는 것도 진화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MBC 주말 특별기획 <환상의 커플>의 한예슬이나 SBS 수목 미니시리즈 <마녀유희>의 한가인처럼 악녀 캐릭터의 전형이 여주인공으로 변모한 것은 캐릭터 진화가 본격화됐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례로 남고 있다.


이동현 기자 kulkuri@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