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종손 박용제(朴鏞濟) 씨 손 귀한 종가 지키는 팔순 어른 문중 '예법書' 발간 등 전톤 계승30여는 검찰공무원으로 봉직… 퇴임 뒤 수신제가로 편안한 노후

예전 어른들은 선현들의 휘자(이름자) 앞에 호나 시호, 봉군호 따위를 붙여서 불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름자를 바로 부르는 경우는 없었다.

이름이 가지는 신성함도 있었지만 선현을 그만큼 존경하고 사모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는 선현의 이력이나 사상,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관례적으로 이름자를 바로 부른다.

그래서 때론 오해도 생긴다. 거두절미하고 ‘박은’이란 선현의 이름자도 그러하다.

역사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혼란에 빠진다. 조선 시대 전기에 동명이인의 저명한 두 선현이 있어서다. 한 명은 조선 태종과 세종 당시에 활약했던 조은(釣隱) 박은(朴訔, 1370-1422)이다.

그는 반남 박씨로 1385년(고려 우왕 11) 문과에 급제한 뒤 조선 시대 들어와 여러 벼슬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식견이 밝고 너그러운 성품에다 확실한 의논을 폈던 이로 알려져 있다.

와 종택은 경기도 파주에 있다. 다른 한 명이 이번에 소개할 읍취헌 박은이란 이다. 읍취헌의 본관은 대가야(大伽倻)의 전통을 이은 경북 고령(高靈)이다. 읍취헌은 조은 박은보다 109년 후배다.

조은이 공신과 좌의정을 지낸 관인으로 유명하다면 읍취헌은 단연 시(詩)로 이름났다. 가정이긴 하지만, 읍취헌이 만일 26세를 일기로 비명횡사하지 않았다면 정승의 반열에 이르렀을 것이다. 애석한 일이다.

읍취헌 16대 종손인 박용제(朴鏞濟, 1926년생) 씨를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빌딩 사무실에서 만났다.

종손 박용제 씨

“우리 읍취헌 자손들은 손이 귀해요. 대수는 많이 내려왔어도 몇 집 안 되요.” 꾸밈없는 종손의 첫마디가 가슴에 찡하게 부딪쳤다. 본래 종가는 충북 괴산군 불정면 탑촌리에 있었다.

종손 또한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괴산은 충북 청주와 멀지 않는 곳이라 자연스럽게 청주대학교로 진학해 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대학 2학년 때 맞은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배운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30여 년간 검찰공무원 생활을 했다.

종손의 사무실 서가 한쪽에는 오래된 송자대전(宋子大全) 영인본 한 질이 놓여 있다.

“저 책은 선친(綺隱 朴元植, 1907-75년)께서 보시던 것입니다. 선친은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명륜전문을 나오셨는데 한학에 조예가 깊으셨어요.

그렇지만 일제 시대라 세상에 나가시지 않고 은둔을 생각해 괴산으로 낙향해 평생을 사셨어요. 한학으로는 군 내에서 저명하셨는데, 아마 지금도 이 사실을 아는 이가 많을 겁니다.”

종손은 선친과 교분이 두터웠던 이수원(李壽源, 성균관 부관장 역임) 씨의 인 신재집(信齋集)을 꺼내서 선친이 지은 시를 찾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제 불효가 막심합니다. 인쇄소가 망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를 되뇌었다.

선친은 성균관 직도 맡아 활동한 유림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한시를 썩 잘 썼던 이다.

종손은 직장 생활에 바빠 자세히 알지는 못했어도 사후에 선친이 남긴 많은 한시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을 발간해 기념하고자 했다. 그러나 믿고 맡긴 사람과 출판사 측이 어이없게도 원고까지 분실하고 말았다.

“제가 선친께 참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은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나 자손들에 의해 수습되어 편집 과정을 거쳐 출판되는 것이 관례다. 선친의 을 아들인 종손이 수습해 간행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원고까지 사라졌으니 애통함은 더할 것이다.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는 읍취헌 관련 자료들을 열람하고 싶었다.

“저희 집에는 제가 기억하기로도 많은 서책이며 사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개가 한국전쟁 당시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선조의 유고조차 구해서 보관하는 데도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낭패감이 역력한 표정이다.

종손은 2책 1질의 읍취헌 유고와 새로 발간된 족보와 묘표(墓表) 탁본첩, 직접 정리해 펴낸 책자 한 권을 탁자 위로 내밀었다.

그중에 고령 박씨 읍취헌공파 문중 간행으로 된 읍취헌공파 문중 가례본(家禮本)이라는 책이 보였다. 2002년 ‘16대 종손 기운(綺雲) 용제(鏞濟)’ 명의로 간행된 이 집안 ‘예법 책자’였다.

그 첫장은 가족생일과 기념일을 적을 수 있는 공란이 있었고 다음 페이지는 고조부부터 선친에 이르기까지의 제삿날을 음력과 양력 모두 적을 수 있게 공란으로 두었다.

문집

그 다음이 제사 진설도인데, 합설(合設)과 단설(單設) 모두를 그림으로 설명했다. 다음은 일반적인 제사 예법과 축문투 등이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종손은 선친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종가 일에 관심이 거의 없다가 갑작스럽게 종손의 소임을 맡고 보니 아는 것이 너무 없어 아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도 알고 후대에도 참고할 수 있게 이 책을 만들었다고 80 노인은 시종 겸손하게 언급했다.

종손의 겸양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족보를 보다가 차종손(朴喆源, 1958년생)에 대해 물었다. ‘지금 성균관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말을 듣고 출신 대학을 묻자 ‘미국에 유학을 했는데 어느 대학인지는 모르겠어’라고 했다.

손자(朴東哉, 1989년생) 역시 서울에 있는 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올 8월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일반인이라면 자식과 손자의 성취에 대해 자랑스럽게 소개했을 터지만 종손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예전에는 타인에게 자식 자랑을 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그것이 예였다.

묘표는 성균관 좨주(祭酒)로 있던 청음 김상헌의 5대손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이 지었고 덕수 이씨 좌의정 이병모가 글씨를 썼다. 미호는 안동 김씨 농암 김창협의 양손(養孫)으로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을 중심으로 해 도학(道學)의 계통을 계승한 문중과 학계의 중심 인물이다.

문장과 글씨가 모두 당대 최고로 정교한 솜씨의 탁본첩은 넘길 때마다 눈이 즐겁다. 선대의 묘갈명이나 신도비명을 탁본첩으로 만들어 보관하는 것도 예전의 반가에서 하는 이력이었다.

읍취헌은 고령 박씨 시조로부터 15세고 종손은 시조로부터 31세 내려와 있다. 읍취헌의 아들 인량(寅亮)의 족보 주에는 ‘家禍不就公車 晩從蔭路 官至通政大夫 司僕寺僉正’이라고 적혀 있다. ‘집안의 재앙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만년에 음직으로 벼슬에 나아가 관직이 통정대부 사복시 첨정에 이르렀다’는 내용이다.

읍취헌의 가계는 9대인 화정(和正) 대에 이르러 맏아들이 무후(无後)가 되었고 둘째아들 역시 계부인 화질(和質)에게 출계(出系)해 둘째집인 화중(和中)으로 대를 이었다.

다시 그의 손자 대인 13대 종손인 경호(慶鎬, 호 雪堂)가 양자다. 그가 종손의 증조부인데, 박정희 전 대통령 집안에서 왔으며 열촌이 넘는다. 박 전 대통령은 항렬로 종손에게 할아버지뻘이 된다. 종손이 4형제, 선대가 4형제다.

읍취헌 종가는 혹독한 가화(家禍)로 인해 그 혈맥을 이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연산군에 의해 군기시 앞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만조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처참한 최후를 맞았고, 다시 친한 벗들까지 색출하여 가혹하게 처벌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혈맥이 목숨을 부지한 것도 천행이었다는 말이다.

종손이 손수 엮은 몇 권의 자료철이 눈길을 끌었다. 클리어 북에 자녀는 물론 사위와 며느리에 이르기까지 주민등록 등본과 호적등본 한 통씩을 넣어 두었다. 법무사로 활동한 평소의 삶의 방식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생각해보니 족보보다 보다 쓰임새가 있을 법한 방식이었다. 아들 란에는 ‘1987년 1월 31일 국외출장’이란 기록도 보였고, 생일 표와 우리 집 제삿날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 박은 1479년(성종10)-1504년(연산군10)

본관은 고령.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
문장·友道로 이름 떨친 정승 반열 선비… 갑자사화에 요절

남곤은 ‘김일손의 문장, 박은의 시는 쉽게 얻을 수 없다’라고 평했다. 남곤은 호를 지정(止亭)이라고 했는데, 기묘사화를 일으켜 정암 조광조 등 많은 인재를 죽인 ‘간신’으로 역사에 오른 이다.

묘비 탁본

그래서 그가 평한 이러한 내용들이 뜬금없다거나 생소할 수 있다. 그러나 남곤은 당대를 대표했던 문장가요 시인이며 정치가였다. 또한 그는 용재 이행과 읍취헌 박은과 함께 성종 대에 신진사류로 입신하였다.

용재 이행, 명종실록, 간이 최립, 송계 권응인, 석주 권필, 교산 허균, 현묵자 홍만종, 북헌 김춘택, 영조, 정조, 자하 신위 등의 평도 이러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8년 연장인 남곤의 이러한 평은 진작 그 정곡을 찌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남곤은 학통에 있어서도,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대표적 제자였다.

용재 이행은 역시 김종직의 제자인 이의무의 아들이며, 박은은 김종직의 제자인 신용개의 사위요 역시 김종직의 제자였던 최부의 제자였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남곤은 서울 백악 아래인 대은암(大隱巖, 경복고등학교 후문 동편 백악 골짜기)에, 이행은 남산 기슭인 청학동(靑鶴洞, 남산 1호 터널 부근)에 그리고 박은이 남산 아래에 집이 있었다.

이들은 백악과 남산을 오가며 서로 만나 시주(詩酒)로 우의를 다졌는데, 이들 우의는 당시 사대부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읍취헌의 ‘지정 선생(止亭先生)에게 화답하며’라는 시를 보면 그 마지막 구절에, ‘남산에 해질 무렵 하도 그리워(更念南山暮)/ 그대 그려 때로 눈 빠지게 기다려(懷人時引頸)’라고 노래했다.

남산 아래서 용재 이행과 이웃해 가난하게 살았던 그는 남곤이 걸음하기를 기다렸다. 남곤만 오면 세 사람이 만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절친한 이와 세상의 시름을 털고 시주를 통해 신선 세계로 내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묘소

읍취헌유고 권2 첫째 수는 이행과 남곤에게 지어준 7언 고시 작품이다. 제목 하단 주(註)에다 적은 사연이 흥미롭다.

용재 이행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 구해온 먹 한 개를 읍취헌에게 준 사실이 있고, 이어서 지정 남곤이 조정에서 쓰던 좋은 종이 100장을 선물했다.

물욕에 사로잡히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마음은 조금씩 무너져 마침내 ‘뉘 다시 내게 붓 한 자루 내려주어/ 평생의 속마음 써내게 해 주려나?’라고 마무리 짓고 있다.

군색한 남산 선비의 살림에 중국 특제 먹에다 조정에서 쓰던 최고급 종이를 받아들고 기뻐하는 장면과, 가능하다면 이에 더해서 몽당붓 한 자루까지 주었으면 하고 농을 건 장면이다.

박은의 경우 시로서만 이름난 것이 아니라 문장으로도 확고한 위상이 있었다. 연산군 대에 문장4걸(文章四傑)로 박은을 위시해 이행, 홍언충, 정희량을 손꼽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홍언충은 허백당 홍귀달의 아들이다. 허백당의 몰년을 보면 1504년(연산군10)이다. 이 해는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던 때로 허백당보다 41년 후배인 읍취헌 박은 역시 1504년이 몰년이다.

읍취헌은 17세에 진사에 합격한 뒤 1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행이 18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남곤이 19세에 생원, 진사에 동시에 합격해 23세에 문과에 급제한 것과 비교하면 읍취헌이 얼마나 일찍 문과에 급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절친한 벗이었던 이 세 사람은 읍취헌을 제외하고는 후일 모두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문과에 급제한 그해(1496년, 연산군2) 12월 15일 실록에, 사가독서 14인을 선발해 아뢴 사실이 올라 있다. 김전, 신용개, 이주, 김일손, 강혼, 이목, 이과, 김감, 남곤, 성중엄, 최숙생, 정희량, 홍언충, 박은이 그들이다.

상주 김씨인 김전이 영의정, 신숙주의 손자인 신용개가 좌의정, 진주 강씨인 강혼이 우찬성, 연암 김씨인 김감이 좌찬성, 의령 남씨인 남곤이 영의정에 오르는 등 혁혁한 이력이다.

뿐만 아니라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서 직언을 올렸고 절의를 지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각각 화를 입은 이들이며, 후일에는 서원에 배향되는 등 역사적으로 길이 기림은 받은 이도 있다. 이 중에 신용개와 박은은 옹서(翁壻, 장인과 사위 관계) 간이기도 하다.

그는 이때 동료 홍언충과 함께 시무십조(時務十條)를 적어 상소했다. 22세 때는 홍문관 수찬 자격으로 국왕이 밤까지 사냥을 한 것에 대해 그 부당함을 논계(論啓)했다.

이듬해인 연산군7년에는 홍문관 수찬으로서 유자광을 논박하고 성준과 이극균 등 대신들의 비행을 상소했다. 이 일로 무고를 받아 하옥된 뒤 파직되었고 25세 때는 가난한 살림살이에 현숙했던 부인상까지 당했다.

이 무렵 이행과 남곤 등과 함께 서울 한강변의 잠두봉(蠶頭峯)을 유람하며 저 유명한 시집인 잠두록(蠶頭錄)을 남기기도 했다. 이듬해인 26세 4월에는 홍문관 재직 시 경연에서 논계한 일이 빌미가 되어 동래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고문을 받았고 6월 15일 군기시 앞에서 공개 처형당했다.

‘거짓된 충성으로 스스로 평안하였고, 신진(新進)으로서 장관(長官)을 모욕하였다’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이었다.

사후 2년 뒤인 중종1년에 승정원 도승지로 증직되었고 중종2년에 이르러 경기도 양지현 금곡촌에 예장되었다. 중종9년(1514)에는 절친했던 벗인 이행과 남곤에 의해 이 간행되었다(이행의 서문). 선조13년(1580)에 다시 손자에 의해 별고(別稿)가 간행(심수경의 발문)되었다.

그의 은 그 뒤에도 효종2년(1651, 정두경의 서문, 4권 1책), 숙종35년(1709, 유득일의 서문, 2권 1책), 정조19년(1795, 정조의 어제 서문, 4권 2책)에 간행되었고, 헌종9년(1843)에 중인(重印)되었으며, 1937년에는 경성제국대학에서 간행된 바 있다.

근자의 저작물로는 읍취헌유고가 강남대 홍순석 교수에 의해 지난 1986년 국역 간행된바 있고, 2004년 <박은시문학연구(한국문화사)>라는 제목으로 재차 간행되었다. 한국의 한시 시리즈 가운데 <박은, 이행 시선(평민사)>이란 제목으로 가려 뽑아 번역한 책도 있다.

절친했던 세 사람은 정치적으로는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박은은 연산군의 폭정 속에서 국왕의 잘못과 중신들의 비행을 직간하다가 젊은 나이에 갑자사화의 희생자가 되었다. 남곤은 갑자사화 때 박은의 벗이라는 이유로 유배되기도 했지만 기회를 잡아 대제학과 영의정에 이른다.

그리고 수많은 어진 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사실은 주지하는 바다.

이행 역시 박은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곤장을 맞고 귀양갔으나 재기해 좌의정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정광필과 함께 권신인 김안로를 제거하려다 유배되어 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남곤의 경우만 이 남아 있지 않다. 이는 그가 후일을 예견해 자신의 시문을 전부 불태우고 죽었기 때문이다. 읍취헌의 경우는 이 일실(逸失)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절친한 벗 용재가 있었다. 용재는 벗이자 조선 최고의 시인이 남긴 걸작을 한 수 두 수 모았다. 당시에 그가 수집한 시가 약 100여 수였는데, 이것이 유고의 근간이 되었다.

용재의 시문은 자신이 손수 엮어둔 것을 바탕으로 손자가 두 번에 걸쳐 간행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일실되었고, 증손자인 동악 이홱??의해 간행되어 7책 규모로 가장 충실하게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호 김원敾?읍취헌 박은 묘표에서 “내가 일찍이 읍취헌의 시를 읽어보니 항상 그 정신이 맑고 깨끗하며 격조가 빼어나며 사물에 속박되지 않아서 좋았다.(…)

홀로 때를 타고 나가지 못하여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고 화를 당해 세상을 떠났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라고 적었다. 그러한 격조를 필자도 공감하고 싶어 다시 그의 시집을 펼쳐 읽었다.

다음 호에는 한산 이씨(韓山 李氏)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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