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비구비 이별의 옛길 오르면 역사와 문화가 그곳에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의 배경, 고려 시대 거란족 물리치던 구국의 전승지이기도

물가 벼랑에 세워진 탁사정. 여름에 인기가 많은 곳이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중년 이상이라면 고향 생각이 절로 나게 만드는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다. 이 노래 배경지인 박달재는 충북 제천에 있다. 높이는 해발 453m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고갯길은 조금 험한 편이라 몇 년 전 박달재 터널이 뚫리기 전만 해도 휴일이면 제법 정체가 심했다.

■ 박달과 금봉의 사연 알려주는 박달재 공원

펑퍼짐한 정상에 자리 잡은 박달재 공원에는 조선 시대 복장을 한 남녀 한 쌍이 애틋한 자태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이 바로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의 주인공인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다. 잠시 사연을 들어보자.

조선 중엽 영남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 이 고개를 넘게 되었다. 마침 저물어 한 민가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집의 과년한 딸 ‘금봉’ 낭자와 눈이 맞았다.

이들은 금방 가까워졌다. 며칠 뒤, 박달은 과거에 급제한 후 금봉과 함께 살기로 약속하고, 그녀가 싸준 도토리묵을 허리춤에 매달고는 고갯길을 넘어갔다.

박달은 한양에 도착했으나 공부는 뒤로 한 채 밤낮으로 금봉이 생각만 했다. 결국 낙방하자 금봉이를 볼 낯이 없었던 박달은 그녀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이 고을 저 고을을 떠돌았다.

한편, 박달을 떠나보낸 금봉은 날마다 고갯마루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와 무사귀환을 빌었다. 그러나 과거가 끝나고도 박달이 돌아오지 않자 금봉은 그리움에 사무쳐 고갯길을 오르내리다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뒤, 박달은 초라한 모습으로 금봉의 집을 찾았으나 그녀는 이미 저승 사람이었다.

땅을 치며 울던 박달 도령이 얼핏 고개를 들어보니 금봉 낭자가 너울너울 춤추며 고갯마루로 달려가는 게 아닌가. 박달은 벌떡 일어나 뒤쫓아 갔다. 고갯마루에 이르러 겨우 금봉을 따라잡은 그는 금봉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순간 금봉의 환영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이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박달재 정상에는 슬픈 연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97년에 세운 성황당이 길손들을 기다리고 있다.

슬픈 연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세운 성황당.

한편, 박달재는 1217년(고려 고종 4) 7월 거란이 10만 대군으로 침공해 왔을 때 김취려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물리친 전승지이기도 하다. 박달재 정상에 있는 역사관은 이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 '조선 의병'의 진원지인 자양영당

박달재 정상에서 제천 쪽으로 내려와 38번 국도를 만난 뒤 500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자양영당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해 한적한 시골 풍광을 즐기며 5km 정도 들어가면 구한말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조선 의병’의 뜨거운 넋이 살아있는 자양영당(紫陽影堂)이 반긴다.

조선 후기에 주리론(主理論)을 크게 일으킨 대학자 화서 이항로(1792-1868) 학맥의 적통이 이곳까지 뻗치게 되는데, 즉 화서의 수제자인 성재 유중교(1821-1893)가 이곳 장담마을에 들어와 자양서사(紫陽書社)라는 아담한 서당을 세우고 학문을 강하자 이곳은 위정척사를 따르는 지식인들의 중심이 되었던 것.

나중에 성재가 세상을 뜨자 의암 유인석(1842-1915)이 뒤를 이어 위정척사의 영수가 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의암은 조선 8도 유림 600여 명을 모아 환란의 시기에 선비들이 처신해야 할 ‘강령 3조’의 통문을 돌리고 본인은 제천의병을 조직하니 모두 3,000명이 넘게 모여 들었다.

박달재 노래비,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박달재 공원.
박달재 노래비,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박달재 공원.

제천 의병은 박달재를 넘어 충주성을 함락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퇴각했고, 결국 유인석은 정예부대를 모아 망명해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자양영당을 뒤로 하고 38번 국도로 되돌아 나온 뒤 봉양읍에서 5번 국도를 타고 원주 방면으로 4km 정도 달리면 탁사정(濯斯亭)이 반긴다.

탁사정은 중국 초나라 때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의 ‘맑은 물에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 발을 씻는다’(淸斯濯瓔 濁斯濯足)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바위·소나무·물이 잘 어우러져 있어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더위를 식히는 피서지로 이름 높다.

탁사정 근처의 배론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황사영이 백서를 쓴 곳. 당시 황사영은 조선의 천주교도 박해 상황과 천주교 신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전하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황사영은 옹기 저장고로 위장한 토굴 속에 숨어 백서를 썼다고 한다.

배론성지까지 둘러봤다면 박달재 주변은 어느 정도 섭렵한 것이지만 빼놓고 싶지 않은 곳이 있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찍은 백운면 진소마을이다.

황사영이 백서를 쓴 배론성지의 토굴.

“나 다시 돌아갈래!” 하며 절규하던 주인공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박달재 서쪽의 백운면 소재지에서 ‘박하사탕’ 촬영지임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10km 정도 달리면 된다.

■ 여행정보

교통

중부내륙고속도로나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 접근한다. △영동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 나들목→ 38번 국도(제천 방면)→ 백운면 소재지→ 박달재 옛 도로→ 박달재 정상. △영동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제천 나들목→ 38번 국도(충주 방면)→ 박달재 옛 도로→ 박달재 정상. <수도권 기준 2시간 소요>

숙식

박달재 근처에 박달재자연휴양림(043-652-0910, 641-4814)이 있다. 탁사정 주변에 숙식할 곳이 많다. 광장가든(043-651-2208)은 소머리곰탕(5,000원), 산채비빔밥(5,000원), 된장찌개(4,000원) 등을 차린다. 민박은 한 가족이 묵을 수 있는 작은 방이 2만원. 봉양 읍내의 묵마을(043-647-5989)은 도토리채묵밥(5,000원), 묵무침(7,000원)이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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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