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정 감독의 초저예산 영화… 진정성 돋보이는 연출력그맘때… 외면하고 싶은 현실 판타지가 있어 행복할 수 있었다.

막대한 물량과 토끼몰이식 관객동원으로 극장가를 초토화시키는 블록버스터의 계절에는 그만큼 소외받는 영화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중엔 극장가에서 존재의 의의를 찾기조차 힘들지만 시장가치로만 재단할 수 없는 보물들도 있다.

<열세살, 수아>도 그런 영화다. 이런 영화가 개봉했나 싶을 정도로 철저한 무관심 속에 종적을 감추게 되기도 하지만 규모에 비해 이야기의 신선도와 만듦새 등은 여느 영화 못지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여름 시즌 덩치영화들의 틈바구니에서 왜 이런 영화를 개봉하는가 싶을 정도로 <열세살, 수아>는 영화의 계절감각과 어울리지 않는다. 빈한한 삶의 무게나 기구한 가족사를 지닌 사람이라면 한번쯤 겪어봤을 듯한 사춘기 소녀의 번민을 속삭이는 어조로 들려주는 <열세살, 수아>는 한 소녀의 성장영화인 동시에 가족 간 화해를 이야기하는 드라마다.

■ 열세살의 비망록

열세 살. 자아를 형성하고 인생관을 정립하기에 충분한 나이는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뭣 모르고만 살아도 좋을 시절이라고 하기에도 그렇다. <열세살, 수아>의 주인공 수아(이세영) 역시 그렇다.

아버지를 여의고 식당일로 억척스럽게 생활을 꾸려가는 엄마 영주(추상미)와 함께 사는 수아는 성격이 살가워서 주변에 사람들이 꼬이는 스타일은 아니다. 간간이 친구를 사귀기는 하지만 붙임성이 좋은 편도 아니고 사소한 오해나 환경 차로 인해 가까이 두고 오래 사귄 벗도 없다.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며 공상을 즐기는 수아의 유일한 낙은 인기 가수 윤설영(김윤아)을 소유하는 것. 비디오가 고장날 정도로 윤설영 뮤직비디오를 보고 그녀와의 환상적인 순간들을 꿈꿔보기도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예민한 사춘기 중학생이 된 수아는 점점 자신이 처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 한다.

죽은 아버지는 다 잊었다는 듯 고물상 주인 아저씨와 가깝게 지내는 엄마도 싫고 뜻대로 되지 않는 친구들과의 관계로도 마음 고생을 한다. 결국 수아는 마음 속의 ‘엄마’ 윤설영을 찾아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열세살, 수아>는 익숙한 공식을 따르는 성장영화다. 샤를로트 갱스부르 주연의 <귀여운 반항아>를 보듯, 수아의 일상은 허다한 인생의 관문들 중 하나를 통과하는 소녀의 성장통을 묘사한다.

성장에는 꿈과 동경, 공포, 좌절, 슬픔 그리고 눈물이 있다. 내지르기보다 안으로 삭이며 현실을 견디는 수아의 캐릭터는 통과의례를 겪는 또래 소녀들의 상황을 그리기 위한 장치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이 가난한 저예산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주인공 수아를 연기한 배우 이세영이다. <아홉살 인생> <여선생 VS 여제자>를 통해 눈에 띄는 아역 연기를 보여준 이세영은 더 이상 ‘아역’이라는 꼬리표가 어울리지 않는 성숙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한 영화를 끌고 가는 타이틀롤 역할을 하기에 그의 공력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새침한 서울내기 역할을 주로 했던 것과 달리, <열세살, 수아>의 이세영은 갑갑하고 남루한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내는 조숙한 10대 소녀로 색깔을 바꿨다.

전작들에서의 세련미는 온데간데없고 허름한 행색에 여중생 교복이 어색해 보이는 가녀린 아이가 됐다.

수아 엄마 영주를 연기하는 추상미 역시 의외의 발견이다. 생활에 밀려 꿈도 사랑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듯한 잡초 같은 엄마를 연기하는 추상미에게 ‘세련된 도시 여성’의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수아가 성장의 통과의례를 겪는다면 영주는 엄마로서의 또 다른 의식을 치르고 있다. 오해에서 시작됐을지언정 성장기의 딸을 돌보지 못한 엄마의 죄책이 그녀의 탄식어린 눈물로부터 저릿하게 전해져 온다.

■ 현실을 이기는 판타지

<열세살, 수아>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삶의 탈출구로 마술 같은 판타지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눈을 감고 외면하고만 싶은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아가 상상하는 각종 판타지들이 그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재회하는 장면이나 수아가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마다 나타나는 윤설영과의 환상적인 만남은 상처받은 소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무한다.

다시 돌아온 현실은 팍팍하기 그지 없지만 꿈을 꾸는 그 순간만큼은 행복감에 젖을 수 있다는 게 판타지의 매력이다. 마지막 순간 환상 속으로만 도피하려 했던 수아는 13년 동안 알지 못했던 엄마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환상은 현실이 된다. 앞길이 보이지 않았던 비주류 열세 살 소녀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진실을 알게 되고 삶의 피로에 휩싸였던 중년의 엄마는 딸을 통해 과거의 아름다움을 되찾는다.

정교하다고까진 할 수 없는 풋내나는 연출력이지만 <열세살, 수아>에서는 연출자의 진정성이 물씬 느껴진다. 영화를 연출한 김희정 감독은 전력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신예다.

단편영화를 통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 등 각종 국제영화제에 출품한 경력이 있지만 장편 연출은 이번이 처음. 폴란드 국립영화학교 ‘우쯔’를 졸업한 김 감독은 칸국제영화제의 신인 감독 육성프로그램으로부터 제작 지원을 받아 <열세살, 수아>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번쩍 눈을 뜨이게 하는 사건이나 격렬한 갈등 하나 없이 미묘한 감정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직조해나가는 재능이 보통은 넘는다.

번듯한 사건 하나 일어나지 않지만 감성 하나 만큼은 인정해줄 만하다. 한국영화 제작비의 거품빼기에 대한 모색이 한창인 가운데 불과 7억원의 초저예산으로 영화 한 편을 완성해 낸 것도 가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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