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썸 걸즈(Some Girl(s)'

점입가경이다. 연극 <썸 걸즈(Some Girl(s)>는 바람둥이의 느물대는 속물 근성을 어이없을 만큼 적나라하게 해부한다. 징그럽도록 뻔뻔한 남자의 화술에 관객은 화가 나다 못해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을 정도다.

주인공 ‘연애 선수’ 강진우는 프랑스에서 명성을 얻게 된 신예 영화감독이다.

약혼녀와의 결혼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와 호텔에 묵으며 옛 연인 4명을 차례로 초대한다. ‘결혼 전 자신의 과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는 것이 이 우스꽝스런 재회의 이유다. 맨 먼저 ‘순진녀’ 양선이 방문한다.

이제는 평범한 주부로 살고 있는 옛 애인이다. 얼마간 안부 인사가 오간 후 결국 양선이 울음을 터뜨리며 결혼 약속을 깨고 갑자기 사라진 진우의 배신과 자신이 치렀던 고통을 이야기한다.

이어서 두 번째 옛 애인이 찾아온다. 닳을 대로 닳은 ‘섹시녀’ 민하다. 순전히 말초적인 육체 관계로 이어졌던 엔조이형 사랑이었지만, 그런 민하에게 진우가 남긴 건 대리 배설과 배신의 상처였다.

연상이자 선배 감독의 부인이었던 옛 정부 ‘당돌녀’ 정희가 세 번째로 방문한다. 정희 역시 불륜 관계가 들통나자마자 혼자 내뺀 진우에 대해 분노가 깊다. 마지막 방문자는 ‘인텔리녀’ 은후다.

사귀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끊고 다른 여자에게 옮겨간 진우를 여전히 용서하지 못한다. 걷잡을 수 없이 절규하는 은후를 어떻게든 달래려고 진우는 예의 능란한 ‘선수 실력’을 발휘한다.

겨우 진정되던 은후가 우연히 탁자 밑에서 수상쩍은 전선을 발견하면서 진우의 진면목이 발각된다.

이 작품은 미국의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닐 라뷰트의 원작을 우현주 번역, 황재헌 각색 및 연출로 무대에 올렸다. 공연은 철저히 대중성에 기반을 두고 무책임한 열정이 빚어내는 상처의 강도와 정체를 여러 각도에서 섬세하게 짚어낸다.

여기에 반어와 역설법의 통쾌한 묘미가 듬뿍 녹아 있는 대사와 짜임새 있는 스토리가 공연의 흥미를 더한다.

캐스팅도 그리 흠 잡을 데가 없다. 강진우 역에 이석준(최덕문 공동 주연), 옛 애인 역으로는 정재은, 정수영, 박호영, 우현주가 출연해 끼를 발산한다. 무엇보다 이석준의 연기가 극 전체의 무게중심을 잘 떠받치고 있다.

사소한 제스처까지 자신의 배역에 철저히 맞춘 이석준의 표현력이 돋보이고 바람둥이 연기도 리얼하다. 미련과 분노, 불안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양선의 연기도 눈에 띈다.

정희 역으로 출연한 박호영은 특히 대사가 입에 딱딱 달라붙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할 만큼 매력을 뿜는다. 극중 진우를 몰아붙이는 힘이 남다르다.

사실상 배우와 대사, 스토리의 힘으로 움직이는 이 공연은 그 외의 ‘포장재’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등장인물 외에 변하는 것이라고는 각 연인들의 방문과 퇴장 때마다 막간 칸막이 효과로 사용한, 귀에 익은 팝송 몇 곡 정도다. 그래도 별 궁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흥행의 급소를 직선공략한 제작진의 능력으로 보인다.

바람둥이의 위선과 거짓을 속시원하게 까발린다고는 해도, 그렇게 해서 사실 관객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퀴퀴한 현실을 맘껏 후려치는 시원함은 있지만, 대신 그 이상의 교훈 같은 것은 여기서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하긴, 남녀의 배역을 반대로 바꾸어 <썸 보이즈>로 똑같이 재연한다 해도 마찬가지 방정식일 듯하다. 다만 모든 것이 탄로난 뒤 자신의 약혼녀와 통화하며 연신 ‘사랑해’라며 아주 잠깐 울먹이던 이 남자의 눈물 성분이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공연은 서울 동숭아트센터에서 8월5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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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