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아파 끝내 승리하리라

“근처에 고양이가 있는 것 같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보이지 않는 더듬이(혹은 촉수)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로의 어느 골목, 작은 정원이 딸린 카페에서 시인 김혜순을 만난 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독하고도 유난한 고양이 알레르기에 대한 이런저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미리 약을 복용해야 할 정도라고.

“분명히 사방 10미터 안에 고양이가 있어요.”

야외 테이블에서 주문을 마친 우리는 실내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 10년 넘게, 아파 들끓던 불면의 밤이면 종종 응급실을 찾듯, 구급약상자를 뒤지듯, 김혜순의 시집을 꺼내 읽었던 내가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 해서 어찌 그녀의 더듬이를 신뢰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의 시가 ‘효과 빠른 진통제’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으니….

‘나는 정말로 슬펐다. 내 몸이 다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 흩어져버리는 몸을 감당 못 해 몸을 묶고 싶었다. 그래서, 내 몸 속의 갈비뼈들이 날마다 둥글게 둥글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몸 전체에 박혔어.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거야, 아마.’ ( - 김혜순의 시 ‘겨울나무’ 중)

‘정말로’ 슬프면서도, 아프면서도 김혜순의 시는 한사코 ‘깨달음의 고요’나 ‘초월의 평온’을 거부한다. 그것이 짐짓 포즈거나 타협이기 십상임을 알기에, 혹여 그것이 놀라운 신(神)의 경지일지는 몰라도 날(生)것으로 꿈틀거리는 인간적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마를 다 뜯어내고 / 아무도 몰래 다락방을 만든 엄마 / 밤이 무거워 잠이 안 와 / 자다 일어나 안경을 쓰고 /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 잠꼬대하는 그런 엄마’ ( - 시 ‘여자들’ 중)

‘세상에! 네 몸 속에 이토록 자욱한 눈보라! / 헤집고 갈 수가 없구나 / 누가 가르쳐주었니? / 눈송이처럼 스치는 손길 하나만으로 / 남의 가슴에 이토록 뜨거운 낙인 찍는 법을 / 세상에! 돌림병처럼 자욱한 눈보라! / 이 병 걸리지 않고는 네 몸을 건너갈 수가 없겠구나’ ( - 시 ‘자욱한 사랑’ 중)

‘오늘 밤 벌써 / 내 얼굴 밖으로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고 / 나는 또 젖은 흙처럼 / 이부자리에 확 쏟아져버린다 // 보내지도 않은 그대의 답장을 읽는 밤 / 나는 또 하룻밤 안에 / 사계절을 다 살아버린다’ ( - 시 ‘병(病)’ 중)

그러니까 이런 것들. 아프게 들끓어 절망 속에 그녀의 시집을 펼쳐들면, 역설적이게도, 더 옳게 아프라고, 더 정직하게 들끓으라고, 더 온전히, 제대로 절망하라고, 호된 채찍질 같은 위로를 받곤 했던 것이다.

“거 봐, 있잖아. 저 녀석….”

아이스 카푸치노가 놓인 테이블 옆 유리창 밖으로 예의 고양이가 어슬렁어슬렁 그녀의 시야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 느끼는 자들을 벌한다.’ --누구의 잠언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피해의식이나 자기연민의 혐의를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예민하다는 것, 더 많이 느끼는 자는 더 많이 황홀하지만 더 많이 고통스럽다.

당연히 황홀은 아주 가끔, 고통은 아주 자주. 따지고 보면 고통처럼 자기본위인 것도 없다. 내밀한 고통처럼 남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도 없다.

때문인지 같은 종류의 고통을 경험한 자들의 교감과 연대는 그만큼 강력하다. 더 많이 느끼는 예민한 자, 우리(김혜순 식으로 말하자면, 여성-연인-환자-시인)는 아프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예민해’라는 고백은 ‘나는 털털해’와는 다르게 흡사 ‘죄’를 털어놓는 뉘앙스를 풍긴다.

‘털털하다’가 둥글둥글 무던하고 성격 좋은,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며 사회생활을 해 나감에 있어 권장할 만한 덕목으로 여겨지는 반면 ‘예민하다’는 더없이 까다롭고 유난하여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처럼 살아가는 데 결코 권장할 만하지 않는 특성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타고난 예민함으로 기쁨과 즐거움보다 슬픔과 괴로움을 더 많이 느낀 입장에서 보자면,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왜 너만 유독 그러니?’ - 나름, 억울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은 다음과 같은 ‘시인의 말’로 시작된다.

‘얼음을 담요에 싸안고 / 폭염의 거리를 걷는 것처럼 / 그렇게 이 시간들을 떨었다 /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 한 줄기 차디찬 핏물이 / 신발을 적실 것처럼.’

그러나 이미 그녀는 시인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정의 내린 적 있다.

“시인은 자신의 아픔을 모셔놓고 그 아픔을 향해 춤을 추는 사람이다. (......) 시인은 그 아픔이 싫어 도망가다 도망가다 병든 사람이지만 그 아픔을 제 서방보다 귀히 여기는 사람이다. (......) 그러나 시인은 제 아픔의 신은 뼛속에 감춰두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어르는 사람이다.”

사실 예민한 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이 더 많이 느껴 알아챈 것들에는 자신의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엄혹한 진실이 포함되어 있다.

벗어나려 했다.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모두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춤을 춰야 한다. 춤을 추지 않으면 지는 것이다. 삶에 패배하는 것이다. 춤은 바로 창조다.

삶을 창조해야 한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러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춤을 춰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로’,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댄스, 댄스, 댄스!

춤, 아닌 게 아니라 김혜순은 학창시절 오랫동안 한국무용을 했다고 한다. 병약한 몸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던 어머니의 권유였다. 그러나 외려 그녀는 춤을 통해 몸의 고통을 더욱 더 잘 알게 되었다고 한다.

고통은 참으로 다채롭고 또 끝이 없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아프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그녀가 혼잣말처럼 답했다. “음, 없지.” 우리는 웃었다.

“마이너스 알파를 확보해야 해요.”

시인이 문득 정색을 하고 흡사 첩보원의 지령처럼, 마법사의 주문처럼 말했다. 플러스 알파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마이너스 알파라는 말은 처음이었다.

“대학에서 시를 쓰겠다는 사람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일, 시인이 되겠다는 사람들의 시를 심사하는 일, 모두 문학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문학 그 자체는 아니에요. 시와 관련된 일이지만 결코 시는 아니죠.

엄마로서, 아내로서,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도 마찬가지예요. 모두 소중하고 중요한 일들이기에 최대한 성실하게 해내려 노력하지만 그 어느 것도 시와 비견할 수는 없어요.

그걸 정확히 무어라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네. 몸, 마음, 영혼, 내 모든 것의 컨디션을 오직 시를 위해 바칠 시간을 확보해둬야 해요.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투명한 막 같은 걸로 나 자신을 감싸두고, 시에 대한 신명이 오를 수 있도록 어떤 서늘한 상태로 나를 만들어두는 것.

그러니까 마이너스 알파라는 거예요. 빈틈없이 꽉 짜여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온전히 시에게 내 줄 수 있는 완벽한 빈 곳을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음, 내가 모시는 시의 신(神)은 질투가 많아요. 내가 시가 아닌 산문만 써도 심통을 부리는 것 같으니….”

김혜순의 아우라, 시종일관 고통에 옳고 정직하게 맞선 자의 당당함과 긍지가 일렁였다. 그녀는 아프다. 완치는 불가능하므로 그녀는 고통을 향해 춤을 춘다. 저의 고통을 귀하게 여기고 남의 고통을 어르고 달랜다. 하여 그녀는 건강하게 아프다. 신이 아니기에 그것만이 인간의 승리다.

‘바다는 지쳤어요 / 파도치기 지쳤어요 / 왔다가 갔다가 그러는 거 이제 그만 하고 싶었어요 / 축축한 바람이 온몸을 둘러싸고 놓아주지 않는 거 / 지구는 둥글어서 내 품도 둥글어서 / 내일인지 어제인지 / 똑같은 세월이 왔다 갔다 하는 거 / 똑같은 등대가 쉴 새 없는 밤낮처럼 커졌다 꺼졌다 하는 거 / 저 머리 숱 적은 섬의 발뒤꿈치 그 짜디짠 소금 맛을 / 혓바닥 속속들이 모두 기억하는 거 / 이제 그만 지쳐버렸어요 / 너를 멀리 데려가 줄게 속삭여놓고는 / 언제나 사랑만 하고 돌아가는 / 저 태양이 밤마다 몸속으로 기우는 거 / 모두 모두 지쳤어요 // 이 세상에서 제일 긴 이야기는 / 시바가 제 아내에게 들려준 70만 댓귀의 / 이야기의 바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 듣기만 하는 데 500일이 걸린대요 / 시바의 아내는 얼마나 지겨웠을까요? / 밤마다 체위를 바꿔가며 듣는 그 이야기 / 저 햇살을 가닥가닥 풀어 / 해가 뜨는 문양의 담요를 짜서 / 이제 그만 재워주고 싶었어요 / 해가 지는 수평선을 도르르 말아 / 붉은 장미 한 송이 그녀에게 갖다 주고도 싶었어요 / 바다는 지쳤어요 / 파도치기 지쳤어요 / 그래서인지 오늘 밤엔 내 방까지 몰려 들어와 / 찬 물결 시린 몸으로 왔다가 갔다가 그러면서 울었어요 / 나는 그만 저 바다가 너무나 불쌍해서 / 웅크린 몸 따뜻한 눈물 한 방울로 / 그 푸른 파도를 꼭 껴안아주었어요’ ( - 시 ‘그녀의 음악’ 전문)

아파, 아파, 아파, 몸과 마음과 영혼이 지르는 비명을 합창으로 듣고 있자면 ‘너는 아직 살아 있어’라는 하모니가 들려온다. 슬프고 힘겨운 ‘승리’다. 더 많이 느끼는 ‘불쌍한 사랑 기계’들, 우리는 하릴 없이 ‘그 푸른 파도를 꼭 껴안아주’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장마철에 접어들었으므로 다시 비가 내릴 것이었다. 그녀의 가방 속에도 내 가방 속처럼 우산이 들어 있으리라. 그러나 그 정도는 굳이 예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카페를 나와 나란히 골목길을 걸으며 내가 물었다.

“지금은 어때요? 있나요, 고양이?”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지 않고도 분명하게 말했다.

“아니, 없네.”

더 많이 느끼는 자, 왈츠의 스텝을 밟듯 경쾌하게 골목길을 걸었다.

● 시인 김혜순

1955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 잔의 붉은 거울> 등을 출간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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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이신조 소설가 zovenb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