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종손 이준교(李駿敎) 씨忠孝의 가풍 잇는 원로 언론인… "독도 박물관 설립에 보람 느껴"30여년 도회생활 끝내고 낙향… 종가 지키며 보종에 힘써

종손 이준교 씨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189번지에는 예안 이씨 충효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집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순국했던 풍은 이홍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일반에게는 ‘예안 이씨 충효당 종가’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집은 건물 자체가 보물(553호)로 지정되어 진작부터 건축가들의 주목을 끌었다.

충효당이 있는 마을 이름은 ‘하리리’이지만 ‘우렁골(芋洞, 상리와 하리리 포함)’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우(芋)라는 글자는 ‘토란’을 의미한다. 이 집에 가보면 별당에 쌍수당(雙修堂)이라는 현판이 높다랗게 게판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백원당(百源堂)이라는 현판도 보인다. 한문을 읽은 사람이라면 충효당이라는 집 이름과 연관 지워 단번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설명을 가한다면, 충과 효는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에 있다.

그 정신이 같다는 말이다. 쌍수에서 쌍이란 둘이라는 의미다. 곧 충과 효를 함께 닦은 집, 또는 닦자는 다짐을 말한다. 백원(百源)이란 모든 근원, 즉 효(孝)를 말한다.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적인 것이다(孝는 百行之源이라)’는 뜻이다.

이 세 현판이 서로를 보완 설명하면서 잘 어우러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판을 통해 이 가문의 지향(志向)을 읽을 수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종가는 연말을 기한으로 현재 전면 보수 중에 있다. 말이 보수이지 안채를 새로 짓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거창한 공사다.

예안 이씨 우렁골 사람들의 이미지는 관향지가 지향하듯 ‘예(禮)’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겸손하다. 이러한 가성(家性)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전의 이씨(全義 李氏)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이란 분에게 세종대왕이 내린 여덟 글자 휘호가 있다.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인경(世守仁敬)’이라는 휘호는 전의 이씨뿐만 아니라 여기서 분파한 예안 이씨들에게도 자긍심을 갖게 하는 가문의 휘장(徽章)이다.

충청북도에 있는 이정간을 모신 사당에도 충효재(忠孝齋)라는 건물이 있고, 전의 예안 이씨 화수회 본부 기관지인 인경회보(仁敬會報) 첫 장을 넘겨도 이 휘장이 자랑스럽게 인쇄되어 있다. 대대로 충효를 이어가자는 가문의 대동 결의가 이 휘호에 모아진 것이다.

충효당 전경

족보를 통해 집안 내력을 읽어보았다. 이 집에서는 컴퓨터로 입력해 데이터 베이스로 관리하고 있어 직계를 빼서 보기에 아주 편리했다.

일목요연하게 보이는 직계는 종손까지 17대를 이어왔는데, 그 중에 두 번의 양자가 있었다. 매우 순조로운 종통 계승이라 할만하다. 그간에 직계에서 8대 주손에서 무과 한 분이 났고, 9대 손에서 문과 급제자가 배출되었다.

풍은 17대 종손은 이준교(李駿敎, 1944년 생) 씨다. 종손은 근자에 은퇴한 우리나라의 원로 언론ㆍ출판인이다. 종손과 학연이 있는 소설가 서지원 씨라는 이가 필자보다 연장인 족질이다.

이런 관계로 초면이지만 각별한 만남을 가진 바 있다. 서지원 씨의 최근 소설에 대해 재차 이야기를 하고 편안하게 종손 이야기를 들었다.

종손에게는 평생의 한이 있다. 중국의 성군(聖君)인 순(舜)임금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다. 종손은 천붕지통(天崩之痛, 부모의 상을 달리 표현한 말)의 아픔을 영아기 때 가졌다.

종손이 1944년 생이고 선친이 작고한 해가 1946년이었다. 선친 이헌진(李憲晉) 씨는 일본 제7상고를 졸업한 뒤 풍산초등 교사 직에 있다 상주 세무서로 옮겨 근무하던 중 당시의 유행병인 윤감으로 덧없이 세상을 떴다.

가장이 없는 자리를 조부모가 채웠는데, 종손의 글에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궁금한 것을 묻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효각 현판

종손은 풍산초등학교를 마친 뒤 문경중학으로 진학한다. 외가가 있는 곳에 가 공부한 것이다. 경북 문경 영순면 말응리는 안동 권씨 부정공파가 세거하는 반촌인데 종손의 외가다. 대구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 신문학과(1964학번), 동 신문방송대학원을 마쳤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작은아버지의 애호가 있었다. 종손은 언론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을 대학과 대학원에서 올곧게 가다듬었다. 예의뿐 아니라 차분한 성품과 특유의 친화력까지 갖춘 종손은 중앙일보에 입사한 이래 33년간 외길을 걸었다.

종손이 손을 댄 편집 작품은 명품의 반열에 올라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시리즈가 ‘한국의 미’란 책이다. 중앙일보사 계간미술에서 시리즈로 발행한 이 책자는 당시 장안의 지가를 올린 명작이었다. 그 중심에 종손이 있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종손은 우리시대 최고의 편집인이다.

“홍사중씨가 작명한 그 시리즈를 제가 24권까지 내고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한 30권 내고 싶었습니다.” 종손은 중앙일보사에 입사한 뒤 삼성문화재단 문화사업실장 등 문화계의 요직에서 일하다 월간미술에서 정년을 맞았다.

가장 보람된 일에 대해 물었다.

“독도박물관을 만드는 일을 처음부터 실무책임자로 맡아 완성한 것입니다. 이 때 평생을 관련자료 수집에 바쳤던 고 이종학 씨와의 인연이 각별합니다. 중앙일보와 경상북도, 울릉군을 넘나들며 조율해서 무난하게 일을 진행했습니다. 지금은 이 박물관이 명소가 되지 않았습니까.”

퇴직 후 종손은 대부분 마음만 있고 결행하지 못하는 환향을 단행했다. 종손이라면 당연한 것 아닌가 할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충효당 현판

수십 년간의 도회 생활의 얽힘이 한 사람을 그렇게 수월하게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종손의 환향은 그 기저에 평생을 함께 한 그리운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더 앞당겨졌다. 노모는 종손에게는 신앙과도 같은 분이다. 현직에 있을 때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종손은, ‘오늘의 저는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계셨다면 없을지도 모릅니다.’ 대략 이러한 취지의 발언이었는데, 이 내용을 본 어머니께서 감격해 마지않았다 한다. 자식의 속 깊은 어머니 사랑을 살짝 표현한 것이었다.

종손을 만나면서 친절함과 봉사정신이 몸에 밴 것을 느꼈다. 짐작대로 종손은 10수년간 보이스카웃 지도자로 봉사한 이력이 있었다. 독도 영유권 문제로 일본 사람들이 억지를 부렸을 때도 그 중심에 있었던 일본 시마네현 사람들과 보이스카웃으로 교류하며 민간 우의를 다진 것을 보람으로 말씀했다.

종손은 조부로부터 종손의 덕목에 대해 관용(寬容)을 배웠다. “싸서 안으라는 가르침이 있었어요. 네 것 챙기면 안 된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였지요.” 마치 어제의 일인 듯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필자가 충효당을 방문했을 때 아픈 다리를 끌며 콩밭의 잡초를 뽑고 있는 노종부를 만났다. 청력이 떨어져 원만한 대화를 못했지만 90노인의 모습은 너무나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대대적인 보수작업 중이라 어느 한 곳에 편안하게 계실 곳이 없지만 매일 집을 찾아 풀 한 포기라도 뽑는 정성, 이것이 바로 큰집을 지키는 안주인의 정신이다.

노종부가 자리를 비웠을 때 수차에 걸쳐 대대로 전해오던 유물 유품을 도난 당했다. 불가항력이었지만 이 점에 대해 조상님께 죄를 지었다고 자책하시는 노종부다.

그래도 문단속을 하는 아들에게 사람의 집에 사람이 와야 하니 그렇게 박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품성을 지닌 이다. 생각해보니 보물로 지정까지 된 이 집은 솟을 대문조차 없다.

종손의 수필을 읽고서 노종부가 풀을 뽑던 텃밭이 유래가 있음을 알았다. 풍은 이홍인의 8대손이며 종손의 9대조인 용눌재 이한오라는 분은 효자로 국가에서 정려까지 된 분이다.

친환으로 권을 간절하게 구하던 중 하늘의 감응으로 꿩 한 마리가 채전(菜田)으로 날아왔다. 잉어와 꿩을 삶아 ‘이치탕(鯉雉湯)’을 끓여 드려 친환에 효험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지금도 날아드는 텃밭의 꿩을 보고 노종부는, ‘그래 니하고 내하고 갈라서 먹자’며 ?지 않는다 한다. 이는 시공을 초월한 보은(報恩)이라 할 만하다.

서울에 올라오면 종손은 자주 을지로에 있는 종회 사무실로 출입한다. 그곳은 예안 이씨 사직공파 종회가 있는 곳이다.

사직공파는 안동의 예안 이씨의 큰집으로 조선 중종 대에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이필간의 아들 이영(李英)이 중종14년(1519)에 기묘사화를 피해 이곳에 낙향해 중종 20년에 건립한 집이다. 이영은 풍은의 큰아버지가 되는 분이다.

사무실에서 문중 사람들에게 안동에서의 예안 이씨가 점하는 위상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국가에서 인정한 충효를 겸전한 집입니다. 그리고 안동에 터전을 잡은 뒤로 수 백년을 살아오면서 퇴계 선생의 문도가 아니면서도 교육이나 혼인에 있어서 양반가로서의 위상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우리 할배들은 퇴계 문도가 없어요.”

대단한 자긍이었다. 사실 안동뿐 아니라 영남 지방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퇴계 선생의 문도가 아니면서 반촌으로서의 위상을 갖기란 쉽지 않았다. 이 집안 내력을 보니, 이미 낙향 이전에 중앙 무대에서 정암 조광조와 갚은 교유가 있었다.

낙향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 선대 인사들이 의도적으로 퇴계 문하에 나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풍은의 조카인 율원(栗園) 이공(李珙, 1533-1612)이란 이의 이력을 통해 알 수 있다.

율원은 생원과 문과 출신으로 경향 간에 벼슬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월천 조목, 송암 권호문과 특히 친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강호가도의 진락(眞樂, 인간의 본성을 닦는 참 즐거움)을 추구하는 면에 있어서 서로의 취향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는 30대 후반에 퇴계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갑작스럽게 선생이 세상을 떠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반인들은 전의(全義)와 예안(禮安)의 두 관향에 다소간의 혼란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 문중에서 낸 유인물에 보면 전의와 예안을 서로 대비해 설명한 문서도 발견된다.

이를테면, 풍은 이홍인을 설명하면서 전의 이씨로는 18세, 예안 이씨로는 9세로 표기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같은 할아버지 후손으로 보문각 직제학을 지내고 예안백(禮安伯)에 봉해진 이익(李翼)이라는 이로부터 전의에서 예안으로 갈렸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건강을 지키는 비결을 물었다.

“제가 등산을 좋아합니다. 산악인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알프스 3대 북벽도 등반했습니다.”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는 말이 생각났고, 다시 넉넉한 종손의 도량에서 인자무적(仁者無敵)을 떠올렸다.

종손은 원주 문막 출신 경주 김씨 사이에서 1남3녀를 두었다. 차종손 이우진(李宇鎭, 1983년생) 씨는 대학에서 고건축을 전공하고 있다. 언론인의 길은 이제 딸이 받아서 잇고 있다.

이 마을에서 충효의 정신으로 나고 자란 인물 가운데 이낙선 상공부장관, 이준승 대법관 등과 같은 이가 있음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 이홍인 1528년(중종20)-선조27년(1594) 본관은 예안, 자는 경회(景會), 호는 풍은(豊隱)
임진왜란 때 안동 지키다 장렬한'최후'맞은 古稀의 의병장

왜 안동 지방에서 우렁골 이씨를 치는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의병장을 했다 하고 충효당은 건물이 보물이며 또 풍산 장터에는 충신과 효자비각이 서 있다. 양반이다. 이런 피상적인 지식만 갖고 있었다.

문제는 풍은 이홍인이라는 분이 문집을 남기지 못해 자료가 널리 알려져 있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진면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쌍수당실기라는 책을 얻어 본 적이 있다.

이 책은 충효당의 역사서라 하도 과언이 아닌데, 풍은 이홍인의 사적오가 그의 8대 주손인 용눌재 이한오의 이력 중심으로 엮었다. 답은, 국가적으로 충신과 효자로 인정해주었고 그러한 가문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필자는 풍은 이홍인이란 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풍은은 당당한 안동의 대표 의병장이었다. 당시 연세가 69세였다. ‘노당익장(老當益壯)’이란 성어가 생각났다.

임진왜란 당시 70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나간 다른 두 충신이 생각났다. 안동의 퇴계 문하인 매암 이숙량이란 분과 경주 최부자 집의 큰집인 잠와 최진립 장군이 그들이다.

최 장군이 무과에 급제한 무신이라면 안동의 매암 이숙량과 풍은 이홍인은 글 하는 선비였다. 문무를 가릴 것 없이 국가를 위해 칼을 들고 일어섰고, 이들 세분 모두 당시에 목숨을 잃었다.

풍은은 어떤 공을 세웠을까? 이 부분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해 세상에 잘 알려지지 못했다고 본다. 기록에 의하면 안동은 임진왜란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한다. 안동 하회마을이 그렇고 퇴계 선생의 강학 공간이 그러했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중심에 예안 이씨 충효당의 중심 인물인 풍은 이홍인이 있었다.

당시 왜군들은 파죽지세로 몰려왔다. 안동 역시 그 화를 면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렇지만 안동에는 의병 운동이 있었고 의병장으로 덕망 있는 인사들이 추대되었으며 반가에서는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내어 군수(軍需)로 사용하게 했다.

경북 군위 출신 아주 신씨(鵝州 申氏)인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라는 이가 예안 현감으로 있다가 지역민을 이끌고 예천 호명리 지역에 진을 쳤고, 권몽삼(權夢參)이란 분은 예천 지역의 의병을 이끌고 의성 다인 지역에 진을 쳤으며 권전(權詮)이라는 분은 용궁 지역의병을 이끌고 우두원에 진을 쳤다.

왜적은 의성 다인 지역을 거쳐 강을 건너 대죽촌(大竹村)에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었다.

■ 700여 장정과 최후의 방어선 구축

그러나 이들 세 고을의 의병진은 접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제 조선군을 총지휘하고 있는 서애 류성룡의 고향 안동 하회를 위시한 안동지역은 저들의 도륙을 당할 운명에 있었다. 이 때 풍은의 빛나는 공이 펼쳐졌다.

풍은은 가산을 아낌없이 털어 의병을 조직하고 하회와 인접한 안동 구담(九潭)에 700여 장정과 함께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과 맞섰다. 싸움에서 일시에 패한 의병장 권전은 남은 병사를 풍은에게 인계하고 의병장의 소임을 지웠다. 풍은은 저들의 칼날을 겁내지 않고 여러 차례 싸웠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몸은 지키지 못한 채 1594년(선조27) 3월 7일 전장에서 69세로 삶을 마쳤다. 빛났을 전략과 통쾌한 승전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최후와 같은 과정이 있었을 것임에도 남은 기록에 없다.

이는 기록이 있었으나 남아 있지 않다는 표현이 온당할 것이다. 집안 증손자인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이란 이가 있다. 고산은 예안 이씨뿐 아니라 영남에 선비의 표상을 강하게 심어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남긴 짧은 관련 기록과 역시 풍은의 종질(從姪)인 시은당(市隱堂) 이진이 남긴 용사일기(龍蛇日記)에 단편적인 자료가 남았을 뿐이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순조 대에 이르러서야 충신의 정려가 내려졌다. 뒤늦은 인정과 보상이다.

■ 순조때 충신의 정려 내려져

풍은의 면모는 전기 자료에 보면 ‘영용절인(英勇絶人), 사예백중(射藝百中)’으로 집약된다 하겠다. 지도자로서의 타고난 자질이 있었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았다 한다.

소학(小學)에서는 전인교육을 강조했지만 조선시대는 상문주의(尙文主義)로 말 타고 활쏘기는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성리학이 강성했던 영남 안동 지방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러한 지역 분위기 속에서도 문과를 통해 입신하지 않고 하나의 기예인 활쏘기에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의병 전투에서 강성한 왜군을 격퇴했다는 것은 단순히 용기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고도의 전략과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풍은은 병법서에도 정통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비의 지향이 있었다. 주위에서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을 권했어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의 아호에 숨?은(隱) 자가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은이라는 글자는 은둔이지만 물러남이요 자기수양이다. 그가 꿈 꾸었을 정신이 충효(忠孝)였고, 이 정신을 500여 세대의 후손들이 17대를 이어 잇고 있다.

다음은 안동 장씨(安東 張氏)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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