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공포·치밀한 복선… 미로처럼 얽힌 스토리 "헷갈리네"

저주 받은 걸작 목록에 올라있는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에서 공동 각본을 맡으며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 받은 손태웅 감독의 늦깎이 데뷔작 <해부학 교실>은 한국 영화 장르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은 데뷔 감독들을 배출하는 호러 영화다.

의과 대학생들의 해부 실습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최근 충무로에서 심심찮게 기획되고 있는 메디컬 드라마,

혹은 메디컬 호러 기획과 희미하게 줄을 대고 있으며, 일본 공포물의 단골 소재인 심령 스릴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굳이 구별하자면 메디컬 드라마적인 소재보다는 원한을 대물림하는 일본 호러의 영향력이 크게 느껴지긴 하지만, <해부학 교실>은 <링>으로 대별되는 사다코 류의 말초적 쇼크 효과만을 노린 영화는 아니다.

매우 복잡한 이야기 구조와 범상치 않은 미장센 효과를 무기로 한 이 영화는 호러 영화의 주된 목적이라 할 공포심 유발 이외에 보다 영화적인 이미지의 힘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 해부학 실습실에서 무슨 일이?

영리하고 차분한 성격의 의대생 선화(한지민)를 중심으로 그녀와 함께 해부학 실습 팀원이 된 다섯 명의 의대생은 각자 나름의 사연과 배경을 지닌 채 운명적으로 살인 사건에 휘말린다.

어릴 적 정신병을 앓은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를 잃고 자신 또한 살해될 뻔한 충격적인 기억을 지니고 있는 선화는 침착한 성격의 팀리더 기범(오태경)의 이성적인 관심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민한 악바리 모범생 은주(소이)는 섹시한 부잣집 딸 지영에게 남자친구를 빼앗겼고, 두 사람의 적대감은 팀 전체의 갈등의 불씨가 된다.

해부학 실습 첫 날 해부용 시체인 카데바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냉정하기로 소문난 담당 교수 한지우(조민기)로부터 꾸중을 듣고 의기소침해진 은주는 혼자서 밤중에 해부학 실습을 하다 살해당한다.

은주의 죽음을 시작으로 선화의 팀원들이 계속해서 살해되자 남은 팀원들은 이 모든 사건의 핵심이 그들의 실습 대상인 카데바에 있음을 알게 되고 카데바에 얽힌 사연을 파헤쳐나간다.

범인은 과연 인간이 아닐까. 아니면 그들이 의심하고 있는 어딘가 수상쩍은 냉정한 교수 한지우일까. 범행이 계속될수록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져들고, 영화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해부학 교실>은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나서 새삼 영화의 처음부터 곰곰이 되짚어보게 만들 정도로 치밀한 복선과 예상치 못한 이야기 전개를 지니고 있다.

원한에 사무친 유령, 저마다 충분히 수상한 기운을 품고 있는 여러 명의 캐릭터들, 출세를 위해 인륜을 저버린 의사들, 의학의 과학적 토대와 끊임없이 충돌하는 죽은 자에 대한 미신에 가까운 공포, 시체애호증, 밀실공포와 사이코 등 이 영화가 소재로 삼고 있는 상황들은 일반적인 공포 영화의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다양하다.

이는 <해부학 교실>을 다른 호러 영화들과 구별 짓는 점인 동시에 이 영화의 단점이기도 하다. 거의 장편 소설감에 가까운 복잡한 이야기 구조는 2시간 남짓한 영화에서 다 풀어내기에는 다소 무리인 것처럼 보인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이야기를 관객들이 쫓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논리적 설명과 영화를 끌고 나가는 이미지의 효과 사이에서 이 영화는 어느 쪽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

지적인 방식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미장센에 치중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캐릭터와 이야기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주연인 한지민과 교수 역의 조민기를 제외하고는 젊은 신인급 연기자들을 대거 등장시킨 탓에 캐릭터의 매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도 이 영화의 아쉬운 점 중 하나이다.

낯선 배우들을 이야기 속의 캐릭터로 무리 없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야기 구조 안에서 각각의 캐릭터의 뚜렷한 역할이 존재해야 하는데, <해부학 교실>의 캐릭터들은 대부분 그들의 사연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동력과 별다른 상관없이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탓에 매력을 잃어버린다.

적절한 복선과 정보들을 통해 이야기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영화의 2/3 가량을 이미지의 효과로 일관하다 마지막에 몰아주기 식 설명을 덧붙이는 진행 방식은 영화의 전체 균형을 깨뜨리고 있다.

■ 사라진 장르의 미덕

<해부학 교실>은 한마디로 말해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다 정작 장르 영화의 중요한 미덕들을 놓치고 있는 영화다. 화려한 미장센과 독특한 편집은 감독의 재능을 충분히 인식하게 만들지만, 결과적으로 영화 전체에는 그만 독이 되고 말았다.

상업 영화의 한계와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영화를 만들지 못한 것은 신인 감독의 경험 부족이라 볼 수도 있고, 감독의 창의성을 충분히 살려주지 못한 취약한 제작 단계의 허점이라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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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 교실>이 새삼 던져주는 교훈은 감독의 개성이 장르 영화 전체의 근간을 넘어선 것이 매우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껏 한국에서 선보였던 수많은 공포영화들이 대체적으로 익숙한 장르의 공식을 무차별적으로 답습해서 식상함을 안겨주었다면, <해부학 교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익숙한 것을 새롭게 구성하려는 시도가 지나친 탓에 쉽사리 관객들에게 다가서지 못했다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한 재능 있는 신인 감독의 탄생을 축하하기엔 지나치게 산만한 영화이지만, 몇몇 탁월한 장면들을 눈 여겨 본다면 감독의 다음 작품은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문제는 감독이 다음 영화에서 얼마만큼의 균형 감각을 보여주는가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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