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판권 지음/ 글항아리 발행/ 1만8,000원
역사학자와 나무, 도대체 어떤 고리로 연결됐을까. 저자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자는 경남 창녕 화왕산 기슭에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학창시절 내내 농사를 거들며 산 천생 촌사람이다. 대학에서 중국사를 전공한 그는 자신의 학문적 과업에서도 농사일에 대한 타고난 숙명을 떼놓지 못했다. 박사학위도 중국의 농업경제사 연구로 땄다.
농촌적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건 자연이다. 그 중에서도 변화무쌍한 사계절과 긴 세월을 초연하게 견뎌내는 나무는 자연의 이치와 섭리를 깨우치는 유력한 매개체가 된다. 때문에 저자가 나무에 대해 깊이 천착해온 것은 나무를 하며 성장기를 보낸 학자로서 아주 별난 일은 아닐 듯 싶다. 벌써 나무와 관련된 저술을 세 권이나 펴낸 바 있다.
저자는 스스로를 ‘모든 것을 나무로 생각하는 환자’, ‘나무 병에 걸린 환자’로 소개한다. 그런 그가 이번 작품에서는 나무로 한자(漢字)를 공부하고, 역사와 고전 등 인문학적 지식을 섭렵하며, 궁극에 가서는 나무 그 자체의 근본을 깨닫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참으로 색다른 나무 책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건 저자가 정말 나무 환자였기에 가능했던 게 분명하다.
이 책에서 저자가 나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독특한 점이 많다. 자작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대목(p164~169)을 예로 들어보자.
자작나무를 뜻하는 한자는 화(樺)다. 나무 목(木)과 꽃 화(華ㆍ주된 뜻은 빛날 화)자가 합쳐진 형상문자다. 북쪽 지방에 주로 사는 자작나무는 흰 껍질에 드문드문 검은 반점까지 드러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용모다.
그런데도 옛 중국인들이 꽃이라는 뜻을 담아 이 나무의 이름을 지은 이유가 뭘까. 저자는 그 까닭을 자작나무의 용도에서 찾는다. 자작나무는 겉은 희지만 속은 검다. 그 검은 알맹이는 기름을 잔뜩 머금고 있다. 당연히 오랜 옛날부터 자작나무는 연료용으로 널리 활용됐다.
저자는 자작나무가 활활 탈 때의 불꽃이 불이 귀했던 옛 사람들에게는 꽃만큼이나 아름답지 않았을까 하며 글자의 뜻풀이를 내놓는다. 흔히 남녀간의 혼례를 ‘화촉(華燭)을 밝힌다’고 하는데 이 역시 애초 자작나무로 붉을 밝힌다는 뜻의 화촉(樺燭)에서 비롯된 표현이라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책에서는 나무에 깃들인 역사와 문학, 설화의 향기도 은은하게 배어나와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한다. 가령 자작나무는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중략)/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라는 평안도 정주 출신 시인 백석(1912~1995)의 시 <백화(白樺)>에 담겨 우리 정감을 자극한다.
이처럼 저자는 하나의 나무에 대해 그 글자의 뜻풀이, 특질, 쓰임새의 소개로부터 인간사와 얽혀 있는 서사(敍事)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책에 소개된 나무는 자작나무 외에도 소나무, 버드나무, 뽕나무, 밤나무 등 우리가 잘 아는 나무로부터 조금은 낯선 회화나무, 팥배나무, 편백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40종이다.
저자는 중국사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한자(한문) 때문에 고통받는 학생들에게 ‘약’으로 주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밝힌다. 중국인들이 글자를 만들 때 가장 많이 본뜬 게 바로 식물이다. 따라서 저자는 한자의 기본 원리를 쉽게 익히는 데 나무만한 소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책은 당초 목표였던 ‘효과적인 한자 교과서’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는 성취를 보여준다. 그것은 ‘나무로 읽는 문화사’라고 평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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