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감함과 유연함의 힘여성성을 가장 풍요롭게 수용하고 표현하는 남성 소설가

여자 안의 남자, 남자 안의 여자 - 무슨 광고의 카피가 아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운운하며 융을 인용할 것도 없겠다. 그것은 온전한 진실이다. 여성의 내면에 남성성이 존재하고, 남성의 내면에 여성성이 존재한다.

주의할 점은 이 명제에서 보다 중요한 것이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 아니라, 바로 ‘내면’이란 점이다.

여자 안의 남자나 남자 안의 여자가 우리의 ‘외면’에 전면적으로 등장한다면, 다시 내면으로 집어넣을 수 없는 지경이라면, 차라리 문제는 단순해진다.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등에 대한 구시대적 편견에 간난신고를 겪을지언정, 그 당사자는 최소한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속이지 않아도 된다는 특권을 쟁취할 기회를 얻는다.

언제나 그랬듯, 문제는 내면이다. 내면이라는 그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어둡고 멀고 두려운 숲. 그곳은 괴이하고 수상쩍고 종잡을 수 없는 것들로 들끓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길을 잃는다.

아니, 반드시 잃고 만다. 그러나 그 길을 잃음에 괴로워하는 축이라면 짐짓 희망이 있다고 하겠다. 진정 안타까운 것은 자신을 외면하는 경우다. 한계가 있지만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모른 척 하면서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다. 놀라운 저주다.

단언컨대, 내가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멋진 인간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성(異性)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여자 혹은 남자다.

그것이 멋진 인간의 유일한 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내면에 존재하는 이성을 스스로 어떻게 인식하느냐, 어떻게 관리하느냐, 어떻게 활용하느냐, 나아가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우리 삶의 질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여성적 장점과 남성적 장점을 조화롭게 극대화시켜 21세기를 주도할 인간형으로까지 일컬어지며 주목받고 있는 ‘알파걸’의 존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불리한 것은 역시 여자 보다 남자다. 불리한 와중에 딱하기까지 한 경우의 대부분은 늙어가는 남자들의 사례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가부장의 뿌리 깊은 권위적 문화, 수십 년간 이데올로기로 군림한 군사독재와 개발독재. 모순으로 뒤틀린 이 나라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중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고 있는 남자들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성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 리, 만무하다. 오랜 세월, 그들에게 여성성이란 감춰야 하는 치부, 버려야 하는 단점, 극복해야 할 약점이었다.

이제 그 결과는 당사자들에게 자못 당혹스럽고 짐짓 참담하다.

자신의 여성성과 불화를 겪고 있는 남자들은 무엇보다 우선 ‘부자연스럽다’. 신체적 노화와 함께 급격히 늘어난 여성호르몬 수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면의 이성을 그 존재부터 부정하려 든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고, 타인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못마땅하게 변해가는 세상 탓이다.

그들이 점점 더 공격적이 되어가는 것은 점점 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위축과 고립 속에서 내지르는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단 말이다!’라는 토로는 안타깝고 애처롭지만 공허하고 진부하다.

구효서는 현재 한국의 남성 소설가들 중 내면의 여성성을 가장 풍요롭게 수용하고 또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가다. 여성성이란 키워드가 지난 20년간 25권의 책을 펴낸 소설가 구효서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것은 될 수 없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임은 분명하다.

구효서는 소설 속에서 1인칭 여성 화자를 즐겨 사용한다. 3인칭 인물로 그려질 때도 그의 여성 인물들은 작품 속에서 객체 보다는 주체로서 기능한다.

“글쎄요, 왜 그럴까. 정확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내겐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광화문의 한 카페. 생과일주스 속의 스트로를 무심히 휘저으며 구효서가 말했다.

몇 년 전, 한 남성 작가가 자신의 소설 속에 1인칭 여성 화자를 등장시켜 여성 고유의 신체적 생리현상을 너무나도 세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화제의 초점은 ‘남자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나’였다. 그러나 나는 그 묘사에 감응할 수 없었다. 세세하고 사실적인 묘사 자체에 기술적 하자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 글은 어디까지나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얻어진 것이었다. 작가 내면의 여성은 없었다. 여성 고유의 무엇은 구효서의 표현대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왠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본질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여성의 생리적 현상을 그저 적나라한 다큐멘터리식으로 보여주는 것에 그쳐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주는 온전한 여성성을 구현할 수 없다.

“밤이 깊어 새벽으로 흐르는 것이 두렵고 안타까우면서도 여자는 발코니에 혼자 서 있는 것이 좋았다. 밤이 여자에게서 잠을 앗아갔다. 살갗에 닿는 밤기운이 차가웠다.

모두들 잠든 새벽 추운 발코니에 홀로 깨어 있는 일이란 은밀하면서도 무섭고, 충일하면서도 결핍된 그 무엇이었다. 복잡하고 혼돈스럽고 신비한 느낌이 여자를 깨어 있게 했다.

단 한번뿐일 밤 같았다. 그러면서 여자는 내내 두려운 마음으로, 어느 방엔가에 머무르고 있을 남자를 생각했다.” (-구효서의 단편소설 ‘밤이 지나다’ 중)

아니나 다를까 구효서는 한때 자신의 성향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것을 마초기질이라 부르든 카리스마라 부르든, 강력하고 압도적인 남성적 개성이 쉽게 각광받기 마련인 한국사회에서 그가 가진 다감하고 유연한 여성적 개성은 반대로 쉽게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 멋대로의 편의적 해석, 낙천적 해석이라 할지 몰라도 결국 인생에서 다감함과 유연함이 더 강한 힘을 갖는다는 걸 분명히 깨달았고 또 실감했으니까요.

지금 내가 중년의 나이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가급적 의연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스물다섯 권의 책을 낸 작가로서 지치지 않고 계속 창작욕을 새롭게 고취시킬 수 있는 것도, 결국은 모두 내가 가지고 있는 다감함과 유연함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구효서는 예의 다감함과 유연함에 품위 있는 문장과 깊이 있는 세계관을 더해 자신이 가진 힘을 끊임없이 단련시켜왔다.

그의 소설집 <시계가 걸렸던 자리>에는 얼핏 자전적 요소가 엿보이는 작품들과 함께, 작가의 외면에 드러난 남성성과 내면에 자리 잡은 여성성이 어떠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실감하게 하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소설 속의 ‘그와 그녀’ 들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생명이 시작된 순간을 되찾기 위해 폐허가 되어버린 고향집을 찾고, 평생 무학(無學)이었으면서도 키에르 케고르를 남몰래 탐독하고, 소금가마니에서 얻은 간수로 밤새 두부를 만들어 자식을 키우고, 유랑의 세월 끝에 모든 것을 다 떠나보낸 뒤 시베리아 숲속에서 알몸으로 바람을 맞고, 삶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면서까지 끝도 없이 배호의 노래를 듣고, 이라크의 황량한 벌판에서 영국의 낯선 호숫가에서 죽음과 세상의 의미를 찾고 또 묻는다.

문득 학창시절 그가 어떤 소년인지 궁금해 물었다.

“책벌레였나요?”

“아니, 읽기보다는 쓰기, 그리기를 훨씬 더 좋아했어요.”

“이해보다는 표현이 더 절실했던......?”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14살 때 가난한 시골 고향집을 떠나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왔어요. 역시나 서울 변두리의 가난한 동네. 사춘기 중학생이 되었고, 모든 게 낯설었고, 병약했고, 외로웠던 것 같아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본능처럼, 그저 무언가를 끝도 없이 쓰고 그리고를 반복했어요. 처음에 조악했지만 글도 그림도 차츰 주변에서 칭찬과 인정을 받을 정도가 됐죠.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소설가보다는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지난 해 가을, 구효서는 한 문학상의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그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낼 시상식의 초대장을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 발송했다. 극진한 글귀와 유려한 그림을 곁들인 아름다운 초대장이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참 쑥스럽기도 하고 참 감사하기도 한 일인데, 올해로 소설을 쓴 지 20년, 중단편만 해도 100편은 넘게 쓴 것 같아요. 그런데 난 아직도 소설 쓰는 일이 참 재미있어요.

그렇잖아요? 어떤 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떠올리고 그것들에 의미와 생명력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세상에 없던 이런저런 것들을 최대한 정성껏 만들어내는 것, 얼마나 좋아요?”

구효서의 어느 소설 속 ‘여자’는 밤하늘 바라보며 리조트의 발코니에서 밤을 새운다.

사랑하는 아이와 남편은 평온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다. 그녀는 행복하다. 그러나 그녀는 가끔 제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내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밤잠을 설친다. 그러나 다감하고 유연한 영혼 -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별빛과 와인과 고양이로 임했던 지난밤은 풀과 나뭇잎에 맺힌 이슬로 겨우 남아 있었다.

그 흔적들마저 빠르게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별의 잔광이 수억 년 동안이나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라면, 허망하게 자취를 감추어버린 지난밤도 무언가의 그늘엔가 오래오래 깃들이지 않을까.

여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아침햇살에 슬며시 드러나기 시작하는 이런저런 그림자들을 응시했다. 깃들일 곳이 없다면, 누군가의 어두운 맘속에라도 머물겠지.” ( - 단편소설 ‘밤이 지나다’ 중)

● 소설가 구효서 연혁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노을은 다시 뜨는가>,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도라지꽃 누님>, <물속 페르시아 고양이>,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시계가 걸렸던 자리>,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슬픈 바다>, <전장의 겨울>, <낯선 여름>,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남자의 서쪽>, <내 목련 한 그루>, <악당 임꺽정>, <정별>, <메별>, <애별> 등을 출간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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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이신조 소설가 zovenbang@naver.com